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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년]](선조 13) [[음력 10월 10일]] 조선의 14대 왕 [[조선 선조|선조]]와 [[순빈 김씨]] 소생으로 태어났으며, 그는 [[조선 선조|선조]]의 여섯째 서자였다. 그는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민가의 재물을 약탈하는 등의 행동을 하여 양사(兩司)로부터 거듭 탄핵당했다. 특히 그는 술만 마시면서 행패를 무렸으며 남의 재산을 빼앗았다. 이복 형인 [[임해군]]이나 또다른 이복 형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으나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이 되었다.
 
임진왜란 직후 도성이 함락되자 그는 [[임해군]] 진과 함께 각각 부대를 인솔, 순화군은 장인인 [[호군]] [[황혁]](黃赫<ref>후에 승지를 역임하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ref>), 처조부 장계군 [[황정욱]](長溪君 黃廷或), [[김귀영]] 등과 함께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기 위해 [[강원도]]로갔으나 성과가 없었고, 동년 [[5월]] 일본군이 [[한강]]을 넘어 북상하자 이를 피하여 [[함경도]]로 들어가, [[함경도]] 방면으로 파견되어 있던 이복형 [[임해군]]의 근왕병 모집대와 합류하여 [[회령]]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자임을 내세워 행패를 부리다가 함경도민의 반감을 샀다. 곧 일본군이 [[회령]]까지 올라오자, 향리로 강등되어 회령으로 유배되어 있던 국경인(鞠景仁)과 그 친척 국세필(鞠世弼) 등의 밀고로, 임해군, 황혁, 황정욱 및 수행원들과 함께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일본군 부장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
 
이후 장인 황혁, 처조부 황정욱과 함께 [[안변군]]의 토굴에 감금되었다가 [[경상도]] [[밀양]]으로 이송되고, [[1593년]](선조 26) 초, 부산 다대포에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군의 본진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는 선조에게 항복 권유문을 쓰게 하라는 강요를 받고 항복권유문을 썼다. 그러나 처조부 황정욱은 비밀리에 항복 권유문은 진심이 아니라는 글을 써서 숨겨둔 뒤, 항복권유문을 쓰는 하인편에 딸려서 같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글을 써서 보냈다. [[1593년]](선조 26) [[8월]] [[부산]] [[다대포]]항에 정박된 배 안에 구금되어 일본으로 보내지려 할 때, 명나라의 사신 심유경(沈惟敬)과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카]]의 회담이 성사되어, 그해 [[9월 29일]] [[부산]]에서 이복형 [[임해군]], [[김귀영]], 장인 [[황혁]], 처조부 [[황정욱]] 등과 함께 조선군에 송환, 인계되었다.
[[1604년]] [[한성부]]의 이수준의 집에 감금된 상태에서 [[풍]]에 맞아 병석에 누워있다가 사망했다. 사망하자 선조는 특명으로 그의 작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다음은 순화군이 죽었을 당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인용문| 이보(李𤣰)가 졸하였다.
【보는 왕자다. 성질이 패망(悖妄)하여 술만 마시면서 행패를 무렸으며 남의 재산을 빼앗았다. 비록 임해군(臨海君)이나 정원군(定遠君)의 행패보다는 덜했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에 이르렀으므로 도성의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 호환(虎患)을 피하듯이 하였다. 이에 양사(兩司)가 논계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안치시켰는데, 이 때에 이르러 죽었다. 상이 특별히 명하여 그의 직을 회복시켜 순화군(順和君)이라 하고, 익성군(益城君) 이향령(李享齡)의 아들 이봉경(李奉慶)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 - 선조 209권, 40년(1607 정미 / 명 만력(萬曆) 35년) 3월 18일(신사) 3번째기사, 이보의 졸기 }}
 
[[숙종실록]]에 의하면 최유연(崔有淵)의 집안의 계집종이 순화군에게 밉게 보이자 순화군이 화를 내며 집안의 가장을 잡아갔다. 최유연은 9세의 나이에 부모에게도 묻지 않고 스스로 순화군을 찾아가 빌며 용서를 구하자, 순화군이 화를 풀고 가장을 풀어주어 효자로 칭송받았다 한다.
 
== 주석각주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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