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리아누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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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키프리아누스는 [[북아프리카]]의 비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관례에 따라 고등교육을 받았다. 연설가로 인정받은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젊은 시절에 [[수사학]] 교수로 활동했으며,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카이킬리아누스]](체칠리아누스)[[사제]]의 영향으로 [[246년]] [[기독교인]]이 되었다.
 
[[세례]]를 받은 그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청빈을 실천했으며, [[248년]](혹은 249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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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교부들》/이원오 외 공저/[[분도출판사]].</ref> 이 문제에 대한 다른 주장들로는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사]]이므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면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아우구스티누스]] 주교, 현재 [[로마 가톨릭]]의 공식적인 가르침이기도 하다.), 안수만 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로마교구의 스테파누스 주교)도 있는데, 스테파누스 주교가 키프리아누스에게 파문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의견마찰을 겪었으나, 스테파누스의 순교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해소되었다.
 
== 주석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