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표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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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념과 출신지역에 따른 파벌로 인해 내부적으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외교독립론'''을 주장한 [[이승만]]계, '''무장독립론'''을 주장한 [[박용만]]계, '''실력양성론'''을 내세운 [[안창호]]계로 대립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은 또한 지역색에 따라 '''기호파'''와 '''서북파''' 등으로도 나뉘었다.
 
게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자체의 대표성 또한 문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한성정부'''의 '승인'·'개조' 문제는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분열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야기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ref>조철행, 국민대표회 개최과정과 참가대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 2009, 24쪽</ref>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이동휘]]·[[박용만]]·[[문창범]]·[[안창호]] 등 각지의 명망가들을 각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신채호]]·[[김숙]]·[[박용만]]등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로,[[문창범]]은 '''한성정부의 '승인'·'개조' 문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는 민족운동세력을 전부 포함하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무장독립운동을 주장하던 [[이동휘]]가 1921년 탈퇴하고 뒤이어 [[안창호]]·[[남형우]]·[[김규식]]등도 탈퇴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는 사실상 '정부'의 역할과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ref>조철행, 국민대표회 개최과정과 참가대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 2009, 2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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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2월 [[김창숙]]·[[박은식]]·[[원세훈]] 등 독립운동가 15인이 1921년 2월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발표했다. 이 격문에서는 무능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과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무장투쟁세력을 포함한 통일적인 정부와 독립운동방향을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강만길 외 173명, 국민대표회 개최과정, «한국사», 한길사</ref> 이에 대해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각료들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운동을 ''정부패궤운동''이라고 규정하고 반발하였다.<ref>곽지연, 국민대표회 반대세력 연구 (1921-1922),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8, 6쪽</ref>
 
한 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외교노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주장하던 [[신채호]]·[[박용만]]·[[신숙]] 등을 비롯한 8개 단체 대표들은 1920년 9월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조직한다. 여기에 참가한 [[하와이]] [[독립단]] 대표 [[권성근]]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실을 폭로하고, 이로써 [[군사통일회]]는 [[이승만]]을 성토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불신임'''을 결의하게 된다. 곧이어 이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불신임에 따른 제반문제를 논의하고 국내외의 독립군을 망라하여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하고 5명의 준비위원을 뽑았다.
 
이어 1921년 5월 6일에는 [[만주]]지역의 [[김동삼]]·[[이탁]]·[[여준]]등이 [[액목현(額穆縣)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개혁안>을 작성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추진한다. 이렇게 국외 각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를 부인하고 개조하자는 요구가 이어지자 [[상하이]]에서도 [[여운형]]·[[안창호]] 등에 의해 국민대표회의 소집문제가 제기된 후 '''국민대표회의 기성회'''가 결성되었고, 이를 토대로 1921년 8월 ''''국민대표회준비회''''가 성립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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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3월 9일 본회의에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개조 제의안(시국문제)에 대한 입장을 둘러싸고 회의는 크게 '''창조파(創造派)''', '''개조파(改造派)'''로 분열되었다. 먼저 '''창조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을 대신할 새로운 주체를 설립하자는 입장으로 [[북경]]과 [[노령]]에 기반을 둔 [[신숙]]·[[문창범]]·[[윤해]] 등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을 주축으로 한 반임시정부 무장투쟁 노선이었다.
 
반면 노선의 일치보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중시하여 모인 '''개조파'''의 [[여운형]]·[[김동삼]]·[[안창호]] 등은 [[상하이]]와 [[만주]]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개조파는 임정이 전 민족적 운동인 3.1운동의 결과물이며 현재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과 성립 이후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해 왔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창조파가 국민대표회의에서 새로운 최고기관을 만든다면 국민들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ref>박윤재, 1920년대 초 민족통일전선운동과 국민대표회의, «학림 제17호»,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1996년, 170쪽</ref>
 
한편 종래 무장독립론을 주장했던 [[이동휘]]는 개조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ref name=autogenerated2 />
 
====개조파의 탈퇴====
창조파는 1923년 3월 21일 의장이 개조안을 본회의에 상정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본회의에서 탈퇴하였다. 창조파의 탈퇴로 본회의 개최가 불가능해지자 28일부터는 창조파와 개조파가 참여하는 비공식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시국문제 토론을 유보할 것과 개조파인 [[안창호]], [[김철수]] 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도록 설득할 것을 합의되었다. 4월 11일부터 다시 정식회의가 개회되었으나 '개조'와 '창조'를 둘러싼 시국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이 때 [[서로 군정서군]]과 [[한족회]]는 각각 대표소환을 지시하여 당시 [[만주]]대표로 활동하던 개조파의 [[김동삼]]·[[배천택]]·[[식 (1877년)|김형식]]·[[이진산]] 등이 결국 국민대표회의에서 탈퇴했다(1923년 5월 15일).<ref>강만길 외 173명, 국민대표회의 결렬, «한국사», 한길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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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표회의 폐회==
[[파일:국민대표회의 개조파 성명서.jpg|섬네일|오른쪽|국민대표회의 개조파 성명서]]
이후 6월 3일 창조파만으로 진행된 회의에서는 새로운 기관을 세워 국호를 '한(韓)'으로 정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창조파는 6월 7일 새로운 헌법 제정과 함께 국민위원회를 조직하고 국민대표회의 폐회를 선언하였다. <ref>박윤재, 1920년대 초 민족통일전선운동과 국민대표회의, «학림 제17호»,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1996년, 177쪽</ref>
 
이에 대해 개조파 위원 57명이 반대성명을 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이에 반대하여 내무총장인 [[김구]]는 '''내무령 제1호'''로서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했다. 이에 일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중심의 창조파는 [[노령]]으로 돌아가 [[레닌]] 정부의 승인을 얻어 새 정부를 수립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한'정부를 따라갔던 창조파 인사들은 1924년 2월말을 전후하여 [[중국]]지역의 각 단체에 복귀해 개별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한편 국민대표회의 내에는 창조파와 개조파 이외에 중도파로서 통일적 대단합을 주장하던 인사가 있었으나 그 수가 극히 적었고, 이후 회의는 6개월간 개최되었으나 본격적인 안건을 처리하지 못한 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막을 내리게 되었다. <ref name=autogenerated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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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표회의 결렬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는 자신의 법통성을 부인하고 새로운 통일기관의 결성을 지지하여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것은 앞서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려 시도했던 국민대표회의의 목표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주석 각주 ==
 
<referenc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