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시모 3세 데 메디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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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642년]],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와 대공비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위로 두 형이 있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그의 교육 문제를 두고 대공 부부는 생각이 달랐고, 결국은 대공비의 뜻대로 신학자 반디넬리가 코시모를 가르치게 되었다. 이러한 교육의 영향으로 코시모는 대단히 독실한 신자였으며 종교 문제에는 적극적이었던 반면, 정치 문제에는 별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그는 하루에 5,6군데의 교회를 다녔고 유대교도가 가톨릭교도와 결혼하거나 한 집에 살거나 가톨릭교도 유모를 쓰는 것을 금하는 등 엄격한 반유대주의 법령들을 제정했다.<ref name="vg">비비안 그린, 《권력과 광기》, 말글빛냄, 2005, p.305~p.313, ISBN 978-89-955988-3-2</ref> 또한 예술과 학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메디치 가의 역대 군주들과는 달리 코시모 3세는 문예에 대한 흥미도 없었다. 그는 대식가로 폭음폭식을 즐겼으며, 언제나 비용에 구애받지 않는 호화로운 연회를 즐겼다.<ref name="sd">소피 도브잔스키 코, 《초콜릿》, 지호, 2000, p.44</ref> 그 비용을 대기 위해 코시모 3세는 백성들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했으며, 이로 인해 그의 치세 동안 토스카나 대공국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코시모 3세는 장수했지만 늘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몰라 불안해했고 후계자 문제에 집착했다.<ref name="vg"/> 그의 세 자녀에게서 후계자를 얻는 것이 요원한 일이란 걸 알자 코시모 3세는 40대 후반이었던 남동생 프란체스코 마리아 주교에게 상속자를 낳아줄 것을 부탁했다.<ref name="vg"/> 프란체스코 마리아는 과스텔라 공작의 딸과 결혼했지만 상속자를 얻지 못하고 죽었다. 코시모 3세는 딸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안나 마리아]]가 공국을 계승할 수 있게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그의 아들 대에서 메디치 가의 토스카나 대공국의 역사는 끝났다.
 
==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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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