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 (실학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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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고령신씨, 사천목씨
|자녀= [[이맹휴]]
|부모= 이하진, 권씨
|친척= 형 [[이잠 (1660년)|이잠]], 형 이해, 형 이침, 할아버지 [[이지안]], 내재종형 [[유형원]], 사돈 [[김세렴]], 당숙 [[이원진]], 종조부 [[이지완]], 증조부 [[이상의]], 사돈 [[김세렴]]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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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교}}
'''이익'''(李瀷, [[1681년]] [[10월 18일]] ~ [[1763년]] [[12월 17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사상가, 철학자, 실학자, 역사가, 교육자로 [[조선 영조]] 때의 [[남인]](南人) [[실학자]]이다. 자는 자신(自新), 호는 성호(星湖)이며, 본관은 [[여주 이씨|여주]]이다. [[의정부]][[좌찬성]]을 지낸 [[이상의]]의 증손이고 [[대사헌]] 이하진(李夏鎭)의 아들이다. 실학자 반계 [[유형원]]에게는 외6촌 동생이 되나, 생전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섬계 [[이잠 (1660년)|이잠]](剡溪李潛)에게 수학하다 송곡 [[이서우 (1633년)|이서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숙종 31년([[1705년]]) 증광과에 합격하였으나 그의 형 [[이잠 (1660년)|이잠]](李潛)이 [[당쟁]]으로 희생된 후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다. 홀로 학문 연구에 진력하다 미수 [[허목]]과 아버지 매산(梅山) [[이하진]](李夏鎭), 반계 [[유형원]] 등을 사숙하였고 이후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루어 근기남인 최대의 학파인 성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조선 영조|영조]]는 그의 명성을 듣고 영조 3년([[1727년]])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으로 임명했으나 사양하고 저술에 힘쓰는 한편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념하여 [[안정복]], [[윤동규]], [[신후담]], [[이중환]] 등을 배출하였고 그의 학통은 [[채제공]], [[정약용]], [[이가환]], [[이현일]] 등으로 이어졌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편찬을 후원하며 자료를 구해주는 등의 도움을 주었다.
 
[[남인]]의 여러 학파들의 마지막 공동 조상으로, 그의 제자들 대에서는 [[남인]] [[성리학]]파와 [[남인]] [[실학]]파, 공서파와 신서파 등의 여러 계파가 분리되었다. 또한 [[천주교]]와 서학의 수용에 개방적이었던 그의 학풍을 둘러싸고 제자들 간에는 성호좌파와 성호우파의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다.<ref name="bulwe">[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407191811071&code=960100 <nowiki>[</nowiki>샘이깊은물<nowiki>]</nowiki> 35. 이익 성호사설 ] 경향신문 2004-07-19</ref> 섬계 [[이잠 (1660년)|이잠]](剡溪李潛), 송곡 [[이서우 (1633년)|이서우]](松谷李瑞雨)의 문인이다. [[경기도]]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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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우한 유년기 ====
{{참고|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
북인 가문 출신이던 이익의 아버지 이하진은 [[조선 숙종|숙종]] 6년([[1680년]])에 일어난 [[경신환국|경신환국(경신대출척)]]으로 서인들에 의해 숙청된 [[남인]] 중진으로 활동하던 문신이었다. [[이하진]]은 [[김석주]](金錫胄)의 비위를 상하게 하여 미움을 받아 유배되었는데, 이익은 이하진의 [[평안도]] [[운산]]의 유배지에서 태어났다. 후일 그의 스승이 된 [[이서우 (1633년)|이서우]]는 동지인 [[이하진]]을 평하여 '의를 위해 희생되었다'며 추모하기도 한다. 1682년(숙종 8) 여름 아버지 [[이하진]]은 향년 55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생후 1년만에 아버지 이하진을 여의고, 선대부터 살던 경기도 [[안산]]의 첨성리로 돌아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이후 20세 차이 나는 형 섬계 [[이잠 (1660년)|이잠]](剡溪李潛) 등에 의해 양육되었고, 10세가 되어서도 글을 배울 수 없으리만큼 병약하였으나 그 뒤 셋째 형 [[이잠 (1660년)|이잠]]에게 글을 배웠다. 22년 연상으로 어버이 같고 스승같던 셋째 형 이잠은 그의 나이 26세 나던 [[1706년]](숙종 32) 진사의 신분으로 [[서인]](西人) 중신(重臣)의 잘못을 비판하고 [[희빈 장씨]]의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리어 형문을 받던 중 곤장을 맞고 장살당했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이하진]]의 직책은 되돌려받았지만 [[1694년]]의 [[갑술옥사]]로 [[남인]]이 숙청당하면서 다시 추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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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천문학|천문]]·[[지리학|지리]]·[[의학|의약]]·[[수학|율산(律算)]]·[[역사|경사(經史)]]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715년]] 어머니 권씨마저 병으로 잃은 뒤 3년간 상복을 입었다. 어머니의 복상을 마치고서는 노비와 집기를 모두 형님 댁으로 되돌려보냈고 가산도 형들에게 넘겼으으나, 형제자질에 대한 우애가 지극하여 불평불만하지 않았고, 이후 당쟁으로 몰락한 그의 일가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이익은 조선문화의 절정기인 18세기를 살면서 그 변화의 조짐을 읽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학문 탐구에 일생을 바친 남인 실학파의 중심인물이다. 그의 실학은 ‘성호’라는 거대한 호수에 모인 수많은 제자들에 의해 활짝 꽃피워졌고 계승되었다. 그러나 천주교와 서학의 수용에 개방적이었던 그의 학풍을 둘러싸고 제자들 간에는 성호좌파와 성호우파의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다.<ref name="bulwe">[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407191811071&code=960100 <nowiki>[</nowiki>샘이깊은물<nowiki>]</nowiki> 35. 이익 성호사설 ] 경향신문 2004-07-19</ref>
 
[[남인]] 중 근기남인 [[성리학]]파와 [[실학파]]에 속하던 그는 [[허목]], [[윤휴]]의 문인들이던 근기남인 학파 내에서도 다시 학문적으로 대성하여 '성호학파'로 불리는 또하나의 새로운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 대에서 [[남인]] 성리학파와 실학파가 분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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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첫째는 붕당의 근원이 과거제도에 있으므로, 인재등용의 방법을 고쳐 문벌이나 당색 중심의 정치를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고,<br />
둘째는 생업을 천시하고 관직만을 통해 부귀영달을 꾀하는 양반들의 생리와 생활 태도를 바뀌야 한다는 것이다.}}
 
성호는 특히 과거제도의 폐단을 논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ref name="haksa"/> 그는 [[과거 제도]]가 학문이 뛰어난 인재를 뽑는다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특정 문벌가문과 재력에 의한 신분세습의 수단이 되고 있다고 비판하였고, 일찍이 [[조광조]], [[이이]], [[유형원]] 등도 과거 제도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폐지할 것을 주장했음을 들었다.
 
{{인용문|
*첫째, 과거만이 유일한 출세의 길이었기 때문에 과거시험 준비에 평생을 소모 하는 폐단이 있는데, 이를 추천제를 통해서 보완하고자 했다.<br /><br />
*둘째, 시험과목이 너무 문예(文藝)에만 치중하여 실용성이 없는 폐단이 있는 것에 대해, 경학(經學)과 시무(時務)를 묻는 시험과목으로 바꿔야 한다.<br /><br />
*셋째, 잦은 과거 시험 때문에 합격자가 너무 많아 붕당이 형성되는 폐단이 있으므로 과거시험을 줄여야한다고 하였다.<ref name="hak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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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국제외교에서도 실리적인 선택으로 사대주의를 주장하였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사대외교가 약자로서 생존할 수 있는 정책으로 인식, 도덕적 이상주의에 젖은 당시의 대외관을 비판하였다.<ref name="haksa"/> 현실성이 결여된 이상주의는 꿈을 해메는 것, 망상이라는 것이었다.
 
이익은 그 자신의 문집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적으로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등을 꼽았다.<ref name="chung177">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77페이지</ref> 그는 정치의 부패가 곧 민생의 파탄을 낳고 이것이 도적을 만드는 원인이라 보았다.
 
{{인용문2|숙종 연간에 교활한 도적 장길산이 해서 지역에 출몰했다. 그는 본래 창우(광대)로서 곤두박질을 잘하는 자로 용맹스럽고 민첩하기가 비상했다. ...(이하 중략)... 병사를 출동시켜 요로를 각각 지키게 하여 밤을 타서 들어가니 도적이 이미 염탐하여 알고 관군을 맞아 더러운 욕을 하더니 마침내 도망하여 자취가 없었다. ...(이하 중략)... 끝내 그 마지막이 어찌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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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반 ====
 
[[조선 영조|영조]]는 그의 명성을 듣고 영조 3년([[1727년]])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ref>가감역은 임시로 설치한 선공감에 소속된 종9품 벼슬</ref>)으로 임명했으나 사은한 뒤 관직을 사퇴하고 저술에 힘쓰는 한편 [[로마 가톨릭|서학]]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천문략(天文略)》, 《[[천주실의|천주실의(天主實義)]]》, 《주제군징(主劑軍徵)》, 《칠극(七克)》, 《진도자증(眞道自證)》 등을 연구하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남인]]들이 대량으로 희생되면서 그의 문인들도 일부 희생되었다. [[1729년]] 47세 때 나라에서 그의 학문과 덕행(德行)을 듣고 몇 차례 벼슬을 내리고자 불렸으나, 한번도 이에 응하지 않고 성포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에만 정진하였으니, 그가 주장한 ‘사농합일(士農合一), '선비는 농사로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유교]]의 이론을 직접 실천하였다. 그 뒤 우로예전에 따라 [[노인직]]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60대 이후 등과 가슴에 악성 종기가 심해지져 고통받았다. 만년에는 아들을 일찍 여의고 칩거하였으며, 70대 후반에 들어서는 풍 비슷한 질환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거동할 수 없게 되었다.
 
[[1751년]]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강세황]]에게 도산서원을 그리도록 특별히 부탁하였다. 강세황은 도산서원도를 그렸는데, 이때 이익이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자신에게 도산서원을 그리도록 특별히 부탁하였다는 것과 자신의 소감, 현지답사 내용 및 제작시기 등을 비교적 자세히 적고 있다.<ref>[http://www.ocp.go.kr:9000/n_dasencgi/full.cgi?v_kw_str=&v_db_query=A1%3A12&v_db=1&v_doc_no=00010252&v_dblist=1&v_start_num=601&v_disp_type=2 도산서원도]</ref> 그는 도산서원도를 애장품으로 하여 머리맡에 두고 보았다. 그는 평생 [[주자]]-[[이황]]-[[허목]]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학문의 정통으로 확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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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군(현 안산시 상록구 일동 555)에 두 부인 고령신씨, 사천목씨와 함께 합장되었다. 묘갈명은 [[조선 정조|정조]] 때 [[우의정]] [[채제공]]이 썼다. [[조선 정조|정조]] 때 [[남인]]이 다시 정계에 진출하게 되면서 왕명으로 그의 저서들이 재간행되기도 했다. 그의 제자들 중 한명인 순암 [[안정복]]은 [[1772년]]부터 [[세손시강원]]에 근무하며 [[왕세손]]이던 [[조선 정조|정조]]를 가르쳤다.
 
그러나 [[1801년]] [[조선 정조|정조]] 사후 그의 학파에서 배출된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 일가 등이 서학도로 몰려 숙청되어 화를 입는다. 이후 그의 학문은 금기시되다가 [[조선 고종|고종]] 때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에 와서야 조명 받기 시작하였다.
 
그의 묘소는 직계 후손이 없어 방치되었으나 [[1967년]] [[5월]] 성호이익추모회에 의해 묘소가 정비되고 묘비와 향로석·망주석 등이 새로이 세워졌다. 그 뒤 성호이익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묘소는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도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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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세관 ===
그는 평생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광주군 (경기도)|광주]] 첨성리(瞻星里) (현 [[안산시]] [[일동 (안산시)|일동]])에 머물러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항상 국가 부흥을 위한 자기의 이상과 포부를 저술하여 [[불교]]와 [[성리학|세유(世儒)]]의 실용적이지 못한 학풍을 배격하고 실증적(實證的)인 사상을 확립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사농합일(士農合-)을 주장했고 아울러 과거제도의 재검토를 제시했다.
 
중농주의 계열의 실학자로서 이익은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에 국가 및 개인 경제의 목표가 있다고 여겼고, 토지의 고른 분배를 강조하면서 토지 경작을 기본적인 경제 정책으로 삼고 [[중국]]의 [[정전제|정전제(井田制)]]를 바탕으로 한 [[한전법|한전법(限田法)]]의 시행을 제창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이나 재산 증식 행위를 크나큰 죄악으로 생각했는데, 특히 화폐나 시장을 부정적으로 생각해 아예 화폐 사용을 중지하자는 폐전론(廢錢論)을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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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의 교조화에 대한 비판 ===
그는 [[조선]] 후기 이후로 학문이 지나치게 교조화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사서육경]]에 대한 학자들 개인의 학문적인 견해를 표출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며 비판한 것이다. 그는 '경전주해'에 대하여 송시열 이후의 유학자들이 취한 태도에 대해 지나치게 교조적이며 자유로운 해석을 못하게 막는 것을 지적했고,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도 이를 언급하였다.
 
{{인용문2|경서 읽기는 실로 어렵다. [[주자]] 이후에 주해가 갖추어진 것이 중용과 대학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그 중에서 주해가 틀리는 것이 있어도 고금이 모든 유학자들이 이것을 찾아내지 못하면서 다만 옛날 주해의 오류를 지적하거나 의심하면 망해(妄解)로 하고 다른 서적과 비교하여 고증을 하면 죄과로 돌린다. 이런 버릇이 있으니 우리나라 학문이 뒤떨어짐을 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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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는 삶을 중심으로 한 이기(理氣)와의 관계와 경학(經學)을 근거로 하여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제를 재해석하였다.<ref name="haksa"/> 성호의 인간관은 삶을 바탕으로 한 현실적 인간을 중시하여, 기혈적(氣血的) 존재로서의 육체적 인간을 강조하였다.<ref name="haksa"/> 성호는 실존적 본성을 재발견하고 인간의 마음의 역할과 감정의 근원을 살펴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인간애의 실천을 위한 사회 개혁 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 서양과학 중 특히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자연과 인간을 독립된 존재로 인식하는 한편, 실증적 방법론에 의한 경세치용적인 경학 연구로 사회전반의 개혁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성호는 우주의 운행질서와 태양·지구·달 등에 관해 기존의 동양 천문학에서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과학적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방대한 저서를 통해 소개했으며, 세계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ref name="haksa"/>
 
또, 그는 경전해석에 있어서도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경전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은 [[허목]], [[윤휴]]로부터 내려오던 전통으로, [[허목]]과 [[윤휴]]가 몰락한 뒤에도 그들의 자유로운 경서 해석론을 계승, 이어나갔다. 경전해석에 있어 기존 학설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를 시도하여, 성리학과 예학을 현실적·체계적으로 정리, 그 대안을 제시하였고, 이를 통해 학자들로 하여금 정치·경제·사회적 현실을 직시케 했다.<ref name="haksa"/>
 
=== 생명의 위계질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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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쟁과 양반 비판 ===
그는 역사학에도 해박하여 [[한국의 역사|역사]] 서술의 태도에서도 종래의 방법을 버리고 비판적·고증적(考證的)인 파악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당쟁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그에 의하면 당쟁의 폐단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투쟁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불필요한 학문으로 지식인들이 대량생산되고, 양반이 실제적인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관직을 얻음으로써 재산을 얻을 수 있기에, 직관과 산관을 포함하더라도 한정된 직제(職制)에 비해 너무 많은 수의 관리가 배출되므로 자연히 당파 싸움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것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는 양반 계급도 생업(生業)에 종사할 것과 양반에게도 세금을 부과할 것과 [[과거 제도]]의 잡다한 점을 없애고 관리 승진에서 신중을 기할 것을 주장하였다.
 
성호 이익은 당쟁으로 편이 갈라지는 이유를 이해 타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ref name="dangjang">[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440935 정적의 아들도 정적?] 아시아투데이 2011년 02월 18일자</ref> 그에 의하면 "무릇 이(利)가 하나인데 사람이 둘이면 당(黨)이 둘이 되고, 이가 하나인데 사람이 넷이면 당이 넷이 되는 것이니, 이가 고정되어 있고 사람만 많아지면 십붕팔당(十朋八黨)으로 가지가 많아지는 법이다.<ref name="dangjang"/>"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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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혼 옹호론 ===
그는 이혼 역시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부인을 집에서 쉽게 쫓아내는 것 역시 지극히 당연하게 여겼다.
 
'이혼에는 적잖은 폐해가 따른다지만 이혼법이 없다 하여 문란한 여자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법이 없다고 해서 불효자를 벌주지 않는단 말인가? 이혼법이 없는 것은 죄 없는 자가 쫓겨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지, 죄 지은 여자를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일 그럴 경우 아이들 교육에 엄청난<ref name="sil191"/>지장을 줄 것<ref name="sil192">정옥자, 금장태, 이광표 외,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효형출판, 1998) 192페이지</ref>'이란게 이혼 옹호의 이유였다. 그는 또 '요즘 풍속이 변하여 집안에서 부인들의 권세가 대단해졌다<ref name="sil192"/>'며 가정에서 여자들의 힘이 강해진 것 역시 부정적으로 봤다.
218번째 줄:
성호는 중국의 청대(淸代) 고증학과 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면서, 자구(字句)에 대한 교감·문자학과 음운학·훈고· 추론 고증의 방법에 의해, 경전을 연구하는 실용주의적 경학(經學)을 추구하였다. 성호는 현실생활을 도외시한 공허한 관념의 유희만을 즐기는 당시의 학문풍토를 비판하고, 하나의 경전이라도 능통하여 실생활에 유익하게 쓰일 수 있는 경세치용적(經世致用的)인 경학을 주장하였다.<ref name="haksa"/>
 
그는 [[조선]]이 중국의 속국은 아니며 자주적인 학문 연구, 자주적인 세계관을 구축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선입견에 의하지 않고 실제의 사실에서 옳은 것을 추구하였는데, 학문에 있어서 실증적 사유는 천문·지리·역사· 제도 등의 각 분야에서 새로운 인식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 나라에 소개되기 시작한 서학(酉學)은 성호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는데, 세계관의 확대와 역사 의식의 심화, 전통적 중화관(中華觀)의 탈피해가게 된다.<ref name="haksa"/>
 
=== 중농주의 정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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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아(自我)’의 자각을 통해 민족의 주체성을 밝히고자 하였다.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놓는 중화주의를 배척하여, 중국이 유일한 천자(天子)의 나라가 될 수 없으며, 서양의 각국이 각기 군주가 있어 자기 역내(域內)를 통치하고 있으므로, 각 국가의 독립적인 주권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하였다.<ref name="haksa"/> 이는 [[허목]] 이후 나타난 [[남인]]학파의 탈중화주의 사상의 연장이기도 했다.
 
성호는 “하(夏 : 中華)를 귀하게 여기고 이(夷)를 천하게 보는 것은 옳지 않다.”“동국(東國)은 다름 아닌 동국일 뿐이다 (東國自東國), 우리 역사는 중국의 역사와 다르다.” 라고 주장하여 소중화(小中華) 의식에서 벗어나 민족적 자아를 발견하고,우리의 역사를 자주적으로 재인식, 새로운 역사적 안목을 지니게 되었다.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일본에 대한 인식도 전통적인 화이적 명분론이나 감정적 차원의 대응에서 벗어나, 세계 여러나라가 더불어 사는 상호간의 교린 (交隣) 체제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올바른 역사 이해와 서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객관적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한 두 가지 사서(史書)에 의존하지 말고, 여러 서적을 상호 비교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료에 대한 문헌비판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도덕적 해석으로부터 독립시켜, 역사에 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인식방법을 제시하고자 노력하였다.<ref name="haksa"/>
 
이익은 우리 나라 역사에 계통을 세워 재구성하기 위해 삼한(三韓)에 정통을 두는 ‘삼한정통론’을 강조하였다.<ref name="haksa"/>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기자조선]]을 민족사의 시원으로 간주하고 [[기자조선]]→[[신라]]를 거쳐서 고려, 조선으로 정통이 이어진다는 [[서인]][[노론]]계 사상과는 정면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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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이 처음 우리 나라를 일으켰고, 그 후 기자조선이 계승하여 남쪽으로 옮겨 마한(馬韓)이란 나라를 연장해 왔기 때문에, 우리 나라 역사의 정통은 단군조선→기자조선→마한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단군조선에서 비롯한 우리나라 역사 의 변천과정 속에 하나의 계통을 찾아내려는 성호는 한사군(漢四郡)의 설치로 역사가 중단된 듯이 여겨졌던 공백기간에, 마한으로 나라가 이어진 계통을 발견하고 그것을 정통으로 내세우게 되었던 것이다.<ref name="haksa"/>
 
그의 정통론은 중국사가와 같이 자기 소속 왕조에 대한 의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 파악에 있어 체계성을 위한 것이었고 한 걸음 나아가 중국의 정통사상 [천자사상]을 극복하게 되었다. 성호에서 비롯한 이 정통론은 안정복·정약용으로 계승 심화되었는데, 순암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통해 역사를 보다 체계적으로 파악하였고, 다산 [[정약용]]에 와서는 현실론적 주장으로 중화주의(中華主義)의 절대성의 잔재가 일소되었으며, 나아가 현실성에 입각한 역사이해를 가능케 했다.<ref name="haksa"/> 그의 삼한 정통론은 민족사적 정통성을 보다 강화하였으며, 그의 후계자이자 수제자인 [[안정복]]은 [[발해]]를 우리 역사로 간주하였고, 이후 [[단군조선]]-[[기자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새로운 역사관의 모태가 되었다.
 
그의 이전의 [[남인]], [[북인]]의 학자들은 중화주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는 중국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남으로서 이전의 [[남인]], [[북인]] 학자들과는 다른 차별성을 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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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냥 남발과 육식에 대한 비판 ===
그는 동물에게도 생명이 있으므로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봤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이므로 동물을 죽일 수는 있다고 봤다. "만물은 사람을 위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사람에게 잡아먹히는 것이다."는 이 이기적 인간중심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성호는 "좋다. 이는 사람의 피를 빨아 먹고 산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를 위해 생겨났다는 말이냐?"라고 반박한다<ref name="dong"/> 생명주의자이지만 대책 없는 생명주의자는 아니기에 동물의 생명을 취할 수 있다<ref name="dong"/>는 것이다. '동물 중에서 사람을 해치는 동물은 이치상 마땅히 잡아 죽일 수 있다. 또 사람이 기르는 가축들은 사람에 의해 길러졌으니, 사람에게 그 생명을 내줄 수도 있을 것이다<ref name="dong"/>'라고 하여 일단 육식, 도살을 인정하였다.
 
{{인용문2|육식은 군자로서도 부득이한 일이니, 또한 마땅히 부득이한 심정으로 먹어야 할 뿐이다. 만약 욕망을 한없이 채우려고 거리낌 없이 살생을 저지른다면, 약육강식의 논리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ref name="dong"/>}}
 
인간의 생명을 해치는 동물은 잡거나 죽일 수 있는 것은 일단 당연하다고 봤다. 또 사람이 키우는 동물, 곧 가축은 본디 먹기 위해 키운 것이니 사람이 그 생명을 취할 수 있다. 역시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이 동물의 생명을 제한 없이 취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ref name="dong"/>
 
사냥, 밀렵의 남발에 대해서도 지적하였다. '그래, 가축은 그렇다 하자. 하지만 저 산에서, 물에서 절로 나고 절로 자란 것들이 모두 사냥과 고기잡이의 대상이 되는 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인가?<ref name="dong"/>' 가축이 아닌 자연 속에 나고 자라는 동물의 생명을 인간이 무슨 권리로 빼앗느냐는 물음이다. 다시 말해 사냥과 어업은 과연 정당한 행위인가라는 질문이다.<ref name="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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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분제 타파 주장 ===
그는 가혹한 노비제와 서얼차별의 사회상을 비판하였다. 천인도 과거에 응시하게 하여, 다양한 인재를 등용시키고, 노비의 수를 줄여 양인(良人)이 늘어나면 국가의 조세와 부역 또한 많아져 국가의 재정이 확대될 수 있다고 하였다.<ref name="haksa"/>
 
=== 허례허식에 대한 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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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저서 ==
* 《[[성호사설]]》(星湖僿說): [[1720년대]]부터 독서 잡기 및 흥미로운 사실을 기록한 것을 문중 조카들이 정리하여 [[1760년]]경 완성한 [[백과사전]]이다.
* 《성호문집》(星湖文集): 27책의 퇴로본과 26책의 서포본 두 종류가 있으며, 시, 부, 서, 잡서, 서, 기, 제발, 제문 등 방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 《이자수어》(李子粹語): 이자는 퇴계에 대한 존칭이며, 수어는 순수한 말씀이라는 뜻으로, 퇴계 이황과 그 제자들의 글 중에서 학문과 인격수양에 긴요한 글을 가려서 종류별로 엮은 책이다.
* 《성호질서》(星湖疾書): 질서란 빨리 쓴 글이라는 뜻이다. 경학에 대한 비판적이고 고증학적인 연구들이 담겨 있다.
* 《곽우록》(藿憂錄): 곽우란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데 이는 곧 이익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재양성과 관료선발, 법제개혁 및 통치일반론, 재정과 화폐문제, 토지소유문제, 국방 등 방대한 분야의 다양한 내용의 글들이 실려있다.
* 《사질유편》
* 《예설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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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