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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8월]] 당시 쌀 120가마에 해당하는 2천원을 국방헌금으로 기증하고 [[9월]]에는 애국경기도호 군용기헌납기성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38년]] [[4월]] 범[[기독교]] 연합단체인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9월]]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으나 혐의점이 없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1940년]]대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그는 의연하였다.
 
{{아버지 [[윤영렬]]의 사후 해평윤씨 문중의 문장(問長)<ref>종친회장</ref> 으로 선출되어 집안 대소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1941년]] [[9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설립될 때 경성지역 발기인의 명단에 올랐지만 참석을 거부하였다. 그해 11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애국기 헌납 기성회 서기에 천거되기도 했다. [[1944년]] [[2월 20일]]에 74세의 나이로 사망였하다.
{{인용문|독일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큰소리 탕탕 치더니 얼마 안 가서 망하지 않았습니까? 일본도 저렇게 우리를 들볶다가는 얼마 안 가서 망합니다.}}
 
아버지 [[윤영렬]]의 사후 해평윤씨 문중의 문장(問長)<ref>종친회장</ref> 으로 선출되어 집안 대소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1941년]] [[9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설립될 때 경성지역 발기인의 명단에 올랐지만 참석을 거부하였다. 그해 11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애국기 헌납 기성회 서기에 천거되기도 했다. [[1944년]] [[2월 20일]]에 74세의 나이로 사망였하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