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세르지오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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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지오 1세는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 결정한 법령은 무효라고 주장하며 반대하였으며,<ref>Hartmann (2012), p. 82</ref> 오류가 있는 법령에 동의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천명했다.<ref name="e222">Ekonomou, 2007, p. 222.</ref> 이어서 그는 자신이 비록 동로마 제국의 신민이기는 하지만, 종교에 관한 문제에서는 세속 정부의 압력을 받지 않을 자유가 있기 때문에,<ref name="e222"/> 퀴니섹스트 공의회를 인정한다는 서명을 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앤드루 J. 에코노무 등의 학자들은 세르지오 1세가 퀴니섹스트 공의회의 어느 법령을 배척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를 추정하였다. 그는 세르지오 1세가 [[교황 호노리오 1세]]를 파문한 것과 더불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에는 동의하였지만, 로마 다음가는 권위를 부여한다는 것에는 배격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ref name="e222"/> 사실 [[교황 레오 1세]] 이래 모든 교황은 [[칼케돈 공의회]]의 교회법 제28항을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이 조항은 당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지위를 옛 로마의 총대주교, 즉 교황과 동등한 지위로 올려놓으려 했기 때문이다.<ref name="d220">Davis, Leo Donald, ''The First Seven Ecumenical Councils (325-787)'',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1990) p. 194</ref> 에코노무에 의하면,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는 총 85개 조항을 신설하였지만, 세르지오 1세는 그 가운데 50개 조항만을 인정했다고 한다.<ref name="e222"/>
 
퀴니섹스트 공의회는 전례 양식과 성직자 양성 등 기존의 교회 관행들을 단일화하는데 중점을 두고 여러 가지 규정을 제정해 법제화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동방 교회의 성직자들로만 구성되었던 퀴니섹스트 공의회는 모든 것을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관행을 중심으로 삼았다.<ref name=Ostrogorsky1957>{{Cite book서적 인용| last = Ostrogorsky | first = George | last2 = Hussey |first2 = Joan (trans.) | year = 1957 | title = History of the Byzantine state | isbn = 0-8135-0599-2 | publisher = Rutgers University Press | location = New Brunswick, N.J. |pages = 122–23 }}</ref> 그러한 배경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방 교회의 눈에 거슬렸던 서방 교회의 여러 가지 관행을 강력하게 비난하였는데, 가령 [[사순 시기]]에 ([[미리 축성된 성찬예배]]가 아니라) 주중에 미사를 봉헌하는 것과 더불어 매년 토요일마다 단식하는 관습, 사순 시기에 [[알렐루야]]를 생략하는 것,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묘사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 등이 그것이다. 더 큰 문제는 [[사제]]와 [[부제]]의 독신 생활과 관련해서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사고방식이 첨예하게 다른 것이었다. 퀴니섹스트 공의회는 기혼자도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누구든지 성직자를 그의 아내와 갈라놓으려 하거나, 어느 성직자든 간에 자신의 아내를 버리려 할 경우에는 [[파문]]에 처한다는 규정을 제정하였다.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묘사하는 것을 금지하였지만, 세르지오 1세는 대중을 위해서는 상징적인 표현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미사 중 성체를 쪼갤 때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성가로 부를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성 베드로 대성전의 안마당에 있는 어린 양으로 묘사된 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장면을 담은 모자이크를 복원하도록 지시하였다.<ref name="e223">Ekonomou, 2007, p. 223.</ref> [[하느님의 어린 양]]은 세르지오 1세가 제정한 여러 가지 전례 예법 가운데 하나로서 초창기에는 라틴어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로도 노래하였다.<ref>Ekonomou, 2007, p. 25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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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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