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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아버지로부터 바둑을 배워 눈부신 성장을 보였다. [[1934년]]에 [[기타니 미노루]]가 중국을 방문한 후에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울특별시|서울]]에 들렀을 때 조남철의 소문을 듣고, 지도 바둑을 둔 바 있었다. 기타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문하에 입문을 권하였고, 조남철은 [[1937년]]에 14세의 나이로 일본에 건너가 기타니의 문하생이 되었다. [[1941년]] 17세의 나이로 [[일본기원]]의 초단이 됨에 따라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기원의 프로 기사가 되었다. [[1943년]]에 귀향하여 [[대한민국|조선]] 땅에 있다가 2년 후 해방을 맞이하였다.
전후에 일본 기원을 모델로 하여 바둑 조직 설립을 목표로 하여 [[1945년]]에 [[한성기원]]을 설립하였고, [[1948년]]에 [[조선기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49년]] 다시 대한기원으로, [[1954년]] 사단법인 한국기원, [[1969년]] 현재의 재단법인 [[한국기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ref name="업적" /> [[1950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실시된 승단 결정전을 통해 3단으로 인정받았다. 그 후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 [[1954년]] 《위기개론》(圍碁槪論)을 펴내 일본식 바둑용어를 우리말로 고치는 데 큰 공헌을 했다.<ref name="업적" /> 종전 후에 다시 바둑 단체 설립을 진행하여, [[1955년]]에 [[한국기원]]을 설립하였다. [[1956년]]부터 시작된 [[국수전]]에서는 제1기부터 9연패 하는 등 50~60년대 한국 바둑계에서 최고 기사로서 활약하였다. 또 한국의 [[김인 (바둑 기사)|김인]], [[조상연]](조치훈의 형), [[조치훈]], [[조훈현]] 등의 일본 유학을 지원했다.<ref name="업적">{{
[[1983년]]에 9단으로 승단하였고, [[1984년]]에 한국기원의 명예이사장이 됐으며 [[일본기원]]으로부터 오쿠라상을 받았다. [[1989년]]에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1998년]]에 제4회 운경상 문화언론부문상을 받았다. [[동아일보]]는 [[1995년]] 명예 국수 칭호를 수여했다. 명예 국수는 조남철 9단이 유일하다.<ref>{{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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