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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생활 및 등단시기 ===
1982년 정신차리고 방송통신대학에 진학하게 되고, 이어 1983년, 광주문화방송에 입사하게 된다. 1990년, 모든 일을 접고 본격적으로 소설쓰기에 매달리게 된다. 은미희의 서른 살,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기로 무섭게 마음먹는다. 그리곤 6년간의 습작기간을 거쳐 1996년 단편《누에는 고치 속에서 무슨 꿈을 꾸는가》로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하고, 1999년에는 단편 《다시 나는 새》로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하여 소설가의 길에 들어선다. 하지만 2000년 겨울, 4개의 상패를 폐기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quote|상패는 작가로서의 탄생을 인정해 주는 기념품에 불과 합니다. 주제넘은 얘기지만 문학예술을 점수로 환산 한다는 그 자체가 몹시 싫습니다. 작가는 무한의 상상력과 체험을 통해 독자들과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건져내야 합니다. 고여있는 물은 썩기 쉽듯 작가들의 정신도 어느 일정한 테두리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상패를 볼때마다 ‘등단 작가’라는 의식이 머리속에 남아 자칫 나태해질 수도 있겠더라구요. 그래서 등단 전의 초발심을 갖기 위해 상패를 모조리 버렸죠.<ref>[http://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4141 남도일보 2001년 2월 15일자, 광주.전남 젊은 주역 50인: 여류소설가 은미희씨]</ref>}}
 
은미희의 등단은 같이 습작하던 동인들에 비해 늦은 편이었다. 은미희는 당시 큰언니는 중학교 국어선생으로 근무했고, 작은 언니는 미술을 전공하고 미술학원을 운영했으며, 하나 밖에 없는 오빠는 사업을 크게 하면서 몇번의 실패와 재기를 반복하던 매우 힘든 시기였다고 술회한다. 하지만, 5.18민주항쟁의 목도와 형제들에게 양보되었던 교육의 혜택 그리고 경제적인 곤궁이 작가 은미희의 자양분이 되었다고 자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