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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종은 폐불 이듬해인 회창 6년([[846년]])에 33세로 붕어하고, 탄압정책도 중지되었다. 그러나 회창 폐불로 중국 본토에서의 경교는 그야말로 쇠퇴하였고, 대진사도 다시 세워지지 못했다.
 
그러나 중원 주변부 지역에서는 신앙이 계속 유지되어, [[케레이트]]나 [[위구르]] 등의 [[몽골 고원]]이나 [[중앙 아시아]]에서는 신자가 존재했다. 몽골 고원의 부족들을 통일하고 중원마저 차지한 [[원나라|원]](元) 왕조 시대에는 중국 내에서도 다시 신자가 생겨났고 [[화남]](華南) 항만도시에서는 경교 교회가 세워지기도 했다. 다만 원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경교가 아닌 야리가온교(也利果温教)<ref>야리가온(也利果温)은 에반게리온(복음)의 음사 표기.</ref>라 불렸고, 당대와는 달리 한역(漢譯) 경전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족에까지 보급된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원 왕조의 몰락, 몽골족 내부의 [[이슬람교]]・[[티벳티베트 불교]]의 보급과 함께 [[동아시아]]에서의 네스토리우스파 신앙은 쇠약해져, [[명나라|명]]대(明代)인 [[1623년]](또는 1625년)에 이르러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발견될 때까지 중국인들에게 잊혀지고 말았다.<ref>구와바라 지쓰조(桑原隲蔵)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 대하여』</ref>
 
== 참조 항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