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랄 웃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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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랄 웃딘은 곧바로 본거지인 [[가즈니|가즈나]]로 돌아와 재기를 도모하여, 현지의 유력자를 규합하고 군사를 모았다. 동년에는 [[카불]] 근교의 파르바로 [[시키 쿠투크]]가 인솔하는 몽골군의 선봉 부대를 물리쳐 몽골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칭기즈 칸]]은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에 주둔하고 있던 본군을 인솔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남하하였다. 잘랄 웃딘의 병력은 각지에서 흩어지고 줄어들었고, [[인더스 강]]까지 남하했다. [[인더스 강]] 하류의 [[딘코트]]에서 행해진 결전에서 잘랄 웃딘은 패배했지만, [[인더스 강]]의 탁류를 이용해서 말을 타고 건너 살아 남은 소수의 부하와 함께 인도로 도주했다. [[칭기즈 칸]]이 이러한 잘랄 웃딘의 모습에 경탄하여, 왕자를 향해 "남자는 자네같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잘랄 웃딘은 인도에서 [[맘루크 왕조]]의 술탄 [[일투트미시]]의 도움을 받아 몽골군과의 싸움을 계속하려 했지만, 거절당하여 [[1224년]] 인도에서 이란으로 돌아와 몽골군의 주력이 몽골 고원으로 귀환한 틈을 타서 이란 고원 중부의 주요 도시 [[이스파한]]에 들어갔다. 그러나, 호라산(이란 북동부 지방)에 주둔하여 [[중앙 아시아]]와 이란을 방어하고 있던 몽골군에게 공격받아 [[아제르바이잔]] 방면으로 도피했다. [[타브리즈]]를 본거지로 한 잘랄 웃딘은 그루지야의조지아의 [[트빌리시]]를 정복하는 등, 남 카프카스로부터 동부 아나톨리아, 시리아 방면의 모든 세력과 싸우고 세력을 펼쳤다.
 
그러나, 너무 활발한 활동과 주변 제국에 대한 약탈로 인해 아나톨리아를 지배하는 [[룸 셀주크 왕조]]와 시리아를 지배하는 [[아이유브 왕조]]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1230년]]에 에르진칸 근교의 야스치멘에서 [[케이쿠파드 1세]]가 인솔하는 룸 셀주크 왕조와 아이유브 왕조의 연합군에 패배해 세력을 잃었다. 게다가 몽골 제국의 대칸 [[우구데이 칸|우구데이]]가 파견한 추격군에게 배후에서 공격당해 아제르바이잔으로 쫓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