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산 (승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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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초기 생애 ===
==== 출생과 가계 ====
본명은 윤달선으로 [[수송소학교]]와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배재고보 당시 그는 수영선수로 활동했는데, 재학 중이던 [[1931년]] [[9월 15일]] 수상경기에 평영 200m에 출전하였다.<ref>"水上競技經過 中學及一般의 部", 동아일보 1931.09.15, 스포츠면 7면</ref>
본명은 윤달선으로 [[대한제국]] 말기의 시종무관이었던 [[윤치성]]과 두번째 부인 서경덕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조선 선조|선조]] 때의 형제 정승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후손으로 6대조 [[윤세겸]]이 동지돈녕부사를 지냈고, 5대조 윤발은 관직이 없었다. 고조부 [[윤득실]]은 [[통덕랑]]을 역임했지만 [[술]]을 좋아하여 38세로 요절했다. 증조부 [[윤취동]]은 일찍이 고아가 되어 형 [[윤교동]]의 슬하에서 양육되었으며 [[아산군]] [[둔포면]]으로 분가하여 농토를 마련하고 부농이 됐다. 할아버지 [[윤영렬]]과 종조부 [[윤웅렬]]이 무관으로 출세하면서 다시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대한제국]] 말기의 시종무관이었던 [[윤치성]]과 두번째 부인 서경덕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조선 선조|선조]] 때의 형제 정승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후손으로 6대조 [[윤세겸]]이 동지돈녕부사를 지냈고, 5대조 윤발은 관직이 없었다. 고조부 [[윤득실]]은 [[통덕랑]]을 역임했지만 [[술]]을 좋아하여 38세로 요절했다. 증조부 [[윤취동]]은 일찍이 고아가 되어 형 [[윤교동]]의 슬하에서 양육되었으며 [[아산군]] [[둔포면]]으로 분가하여 농토를 마련하고 부농이 됐다. 할아버지 [[윤영렬]]과 종조부 [[윤웅렬]]이 무관으로 출세하면서 다시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 [[윤치성]]은 이미 상처한 상태에서 서경덕과 재혼하였는데, 포산에 의하면 [[조선 고종|고종 황제]]가 [[윤치성]]이 젊은 나이에 상처한 것을 딱하게 여겨, 자신의 승은을 입었던 궁녀 하나를 윤치성에게 내려주었다고 한다. 생애 후반의 포산은 자신의 시중을 들던 도일 스님 등 상좌들에게 이를 강조하였다. [[1910년]](융희 4) [[10월 1일]]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아버지 [[윤치성]]은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 학창 시절 ====
본명은 윤달선으로 [[수송소학교]]와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배재고보 당시 그는 수영선수로 활동했는데, 재학 중이던 [[1929sus]] [[9월 2일]]과 [[9월 3일]]에 열린 전조선수영경기에는 D조로 출전하였고<ref>"綠陰 우거진 駱山下 開慕된水泳競技", 동아일보 1929.09.02, 스포츠면 2면</ref>, [[1931년]] [[9월 15일]] 수상경기에 평영 200m에 출전하였다.<ref>"水上競技經過 中學及一般의 部", 동아일보 1931.09.15, 스포츠면 7면</ref>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그는 18세에 [[광주 학생 운동]]에 연루된 것이 출가 동기로 작용, 19세에 [[오대산]]에 입산했다가 [[만공 (승려)|만공]]을 은사로 하여 [[정혜사]]에서 득도하였다.<ref name="ppp41"> 박부영, 원철, 김성우, 석영당 제선선사 (비움과소통, 2011) 41</ref> [[1926년]]의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가담했다가 [[1928년]] 이것이 탄로나게 되자, 그 이듬해인 [[1929년]] 속세를 버리고 [[오대산]]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