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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부에 뿌리 깊이 정착된 노예 제도의 문제는 건국 때부터 이견이 분분했었다. [[미국 헌법]]은 노예 제도가 유지되지 않았다면 비준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헌법에는 5분의 3조항이 있어 [[미국 하원]] 의원의 각주 정원수를 결정하는 근거로 주 인구에 주의 노예 인구의 5 분의 3이 가산되어 있었다. 이것은 [[노예 주]]와 [[자유 주]]의 이익의 균형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국가를 확대하고 새로운 주를 자유 주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노예 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 노예 제도에 관한 논란은 커졌고, 한 방향으로 진행해서 권력의 취약한 균형을 언제든지 무너뜨릴 우려가 있었다. 1820년 [[미주리 타협]]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이후 [[1850년 타협]]은 유사한 목적으로 행해졌지만, 나라 전체가 내란에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1854년]] [[캔자스 네브래스카 법]]은 [[캔자스 준주]]와 [[네브래스카 준주]]를 설립하고 미국인 개척자 땅을 개방하게 되었다. 이 법은 2개의 준주가 주로 승격할 때 노예 제도를 인정 여부를 주민들에게 결정하게 한다는 것으로 실질적으로 [[미주리 타협]]을 철폐하는 것이었다. 이 주민들에게 결정하게 한다는 개념은 현재 ‘주민 주권’이라는 것으로, 미국 상원 의원, 상원 영토 문제 전문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스티븐 더글러스]]가 제창한 것이었다. 주민 주권은 서부와 북부의 새로운 준주에 노예 제도를 확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며, 남부 주에 양보하는 시도였다. 이 원칙은 캔자스 준주에서 ‘불법 거주자 주권’이라고 하여, [[루이스 캐스]] 상원 의원은 시행을 방해했다. 캐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싱턴 데일리 유니언’에 투고한 글에서 그것을 이론적 구조를 제공함으로써 ‘주민 주권의 아버지’(''Father of Popular Sovereignty'')라는 호칭을 받았다. 또한 캐스는 184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도 지명되었다.<ref>{{cite서적 book인용|last=Klunder|first=Willard Carl|title=Lewis Cass and the Politics of Moderation|url=http://books.google.com/books?id=XlQHi_dJyRUC&pg=PP1&dq=isbn=9780873385367&ei=_i8eSJTuGpjwtAPMnf3lBg&sig=oJi7Vp5R9z6B-8wJ5EDqWiVB77s#PPA2,M1|accessdate=2008-05-04|year=1996|page=168|publisher=[[Kent State University Press]]|location=Kent, OH|isbn=0-87338-536-5}}</ref>
 
당초 캔자스 준주에 들어와 노예 소유주가 되는 사람들은 극히 적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캔자스가 노예를 활용하여 이익을 내기에는 너무 북방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주리 강을 따라 캔자스 준주 동부는 인접한 건너편에 있는 미주리의 ‘블랙 벨트’와 마찬가지로 노예를 이용한 농업에 적합했다. 캔자스 준주에 주 정부를 만들고 그곳을 어떤 주로 할 지에 대한 문제는 그 주 경계를 넘어 매우 정치적인 사안이 되었다.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노예 주]]인 [[미주리 주]]는 북쪽으로 [[아이오와 주]]에, 동쪽으로 [[일리노이 주]]에 접하는 곳으로 주변이 모두 [[자유 주]]로 [[노예 주]]로는 고립된 위치에 있었다. 주의 대다수는 노예가 없었고, 노예 소유자 수는 주 인구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것이었다. 캔자스가 자유 주로 미합중국에 가입하면 미주리는 3면이 자유 주에 둘러싸이게 될 것이었다. 노예 주와 자유 주 경계에 해당하는 주에서 노예 해방, 노예 제도 폐지 운동과 도망 노예가 반드시 생길 수 있었으므로, 옆에 자유 주가 있다는 것은 미주리의 노예 소유자에게 상당한 위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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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5월 22일]] 오후, 미국 상원 회의장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 민주당 하원 의원 [[프레스턴 스미스 브룩스]]가 매사추세츠 [[자유토지당]] 상원 의원 [[찰스 섬너]]를 폭행했다. 그는 지팡이로 섬머의 머리를 때렸으며, 섬너는 자신이 흘린 피로 눈이 보이지 않았으며, 쓰러져서 의식 불명이 될 때까지 지팡이에 찔렸다. 브룩스는 지팡이가 부러질 때까지 섬너를 계속 폭행했다. 다른 상원 의원 몇 사람이 섬너를 도우려고 했지만, 권총을 들고 ‘그냥 둬!’라고 외치는 로렌스 키토 하원 의원에 의해 제지를 당했다. 이 사건은 그 전에 섬너가 캔자스에서 노예제 지지자의 폭력 사태를 비난한 연설에서 브룩스의 친척 의원을 모욕한데 대한 보복이었다. 섬너는 이때 머리와 목에 입은 상처로 3년간 상원 회의장에 돌아오지 못했다. 섬너는 노예제도 반대운동가들의 순교자가 되었다.
 
이 사건은 존 브라운을 자극하여 그가 [[캔자스 준주]]에서 일행을 이끌고 포타와토미 크릭의 노예제도 지지자 개척지를 습격하게 했다. [[5월 24일]] 밤 브라운의 아들 중 4명을 포함한 집단이 노예제 지지자 남자 5명을 잡아서 그들의 집에서 폭이 넓은 칼로 찍어 죽였다. 그날 밤 처음 습격한 세 오두막에서 포로로 잡은 사람들 중에 제롬 글랜빌과 제임스 해리스에게 자유 주 주민들에 대한 폭력 사태 연루에 관해 여러 가지 심문을 했으며, 그들이 그 사건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해리스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나머지 오두막에서 붙잡힌 윌리엄 셔먼은 크릭 근처의 벼랑에서 칼로 살해당했다.<ref>{{Cite서적 book인용|title=John Brown: "We Came to Free the Slaves"
|last=Schraff|first=Anne E. |authorlink=|last2=|first2=|editorn-last=|editorn-first=|edition=|volume=
|year=2010|origyear=|page=56|pages=|publisher=Enslow|place=|url=http://books.google.com/books?id=g9vccT4QhlIC&lpg=PA56|accessdate=|isbn=9780766033559|oclc=}}</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