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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국공합작]]이 결렬된 직후 우한에서 열린 열린 중국공산당의 제5차 당대회에서 왕은 잠시 당의 선전부장이 되었지만 미프와 함께 소련으로 되돌아 왔다.
 
스탈린의 [[칼 라덱라데크]] 숙청 이후, 미프가 모스크바 중산대학의 교장과 코민테른의 동방부의 부부장을 맡았다. 이때 미프를 보좌하면서 왕은 소련에서 교육받은 중국인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인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을 구성하였고, 스스로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를 자처하였다.
 
1929년 왕밍과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은 귀국하여 당권을 장악하려고 하였으나 [[장궈타오]]와 [[저우언라이]]의 저항을 받아, 한직을 멤돌았다. 이때 실질적으로 당을 이끌었던 [[리리싼]]이 맡고 있던 당의 선전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당의 기관지인 《[[훙치]]》에 리리싼의 노선을 지지하는 여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30년, [[상하이]]에서 열린 비밀 당대회에 참가하던중 체포되었으나, 그의 정확한 신분을 눈치채지 못한 [[중국 국민당|국민당]] 경찰의 감시 소홀로 탈출에 성공할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