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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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적 ==
=== 젊은 시절의 행적 ===
고향인 고당의 제의 지방으로 이름 높은 번화가로서 유명한 것으로부터, 관리들은 거기서 놀고 있었으나, 화흠은 휴일에는 문을 닫고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논의에 대해서도 항상 공평했고, 상대를 상처 입히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ref> 《위략(魏略)》에 의하면, 젊은 무렵 화흠을 용의 머리, 병원을 용의 배, 관녕을 용의 꼬리라고 하여, 「일룡(一龍)」이라 칭했다.</ref>
 
이때 같은 군의 도구홍(陶丘洪)과 서로 명성을 두고 경쟁을 하였은데, [[영제]](劉宏)의 치세로 기주자사(冀州刺史) [[왕분 (후한)|왕분]](王芬)이 황제를 폐립시키려고 할 때, 그 계책에 동참하려 하였던 도구홍을 엄하게 충고한 것으로 부터, 도구홍도 화흠을 인정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중(郎仲)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났기 때문에 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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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년]], 양주자사(涼州刺史) [[유요 (후한)|유요]](劉繇)가 [[손책]](孫策)에게 추격당해 죽자, 그의 가신들이 화흠에게 의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화흠은 멋대로 임명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거절하였다.
 
이 후, 손책이 화흠을 공격하자, 화흠은 손책이 용병술에 교묘한 것을 알고, 은사(銀士)가 쓰는 두건을 쓰고 항복하였다. 이때 손책은 화흠의 명성을 잘 알고있었기 때문에 그를 상객으로서 대우하였다. <ref>《오력(吳曆)》《보서(譜敍)》《강표전(江表傳)》</ref>
 
[[200년]], 손책이 죽자 [[손권]](孫權)을 섬겼으나, [[조조]](曹操)의 부름으로 관도(官渡)로 떠나려하는데, 손권이 이를 말렸으나, 화흠은 손권과 조조와의 국교가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데 손권을 위해 움직일 수 있게 간청하였기 때문에 손권은 [[장굉]](張紘)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떠나게 하였다. 출발하기 직전에 수천 명의 빈객들에게 전송받아, 전별(餞別)도 많았으나, 화흠은 전별에 표시를 남겨두어, 겨우 출발할 때가 되자, 빈객들에게 전부 돌려줬다. 빈객들은 화흠의 덕의에 감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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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31년 죽음]]
[[분류:조조 휘하의 정치인]]
[[분류:삼국지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정치인]]
[[분류:중국의 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