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태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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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은 [[야마구치 현]] [[야마구치 시]](山口市) 쇼후쿠지(乗福寺)에 안치됐다. [[백제]] 멸망 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어느 곳에도 등장하지 않아 잊혔다가, 14세기 말엽인 [[1398년]](조선 정종 1년) [[7월]] 당시 서일본의 패자였던 [[오우치 요시히로]]가 조선 조정에 [[성명왕]]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의 족보를 입증해 달라는 공문을 [[조선 정종|정종]]에게 정식으로 보낸 사실이 정종실록에 기록되면서 한국에 알려졌다.
 
== 가족 관계 ==
아들 임용 계열은 5대까지 작위를 받고 6대손 대내정항(大內正恒)의 대에 이르러 작위가 끊겼다. 부여의광(夫餘義光) 계열은 23대 가림왕 의지(家埜王義之)까지 작위가 계승되고 대내지개(大內之介)에 이르러 작위가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