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 히딩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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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자 경력 ==
=== 초기 클럽 ===
더 흐라프스합에서 보조 코치로 지도자의 가능성을 보인 후 [[1983년]]부터 [[1987년]]까지 [[PSV 에인트호번]]의 보조 코치를 지냈으며, [[1987년]]에는 PSV의 감독이 되었다. [[1988년]] 팀 창단 이래 최초로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과 유럽 축구 역사상 3번째의 [[트레블]]을 달성하며 팀을 [[AFC 아약스]], [[페예노르트]]와 함께 [[네덜란드]] 축구 리그의 3강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올려놓았다. 또한 [[1987년]]부터 [[1990년]]까지 팀에 두번의 [[에레디비시|네덜란드 1부 리그]] 타이틀과 한번의 준우승을 안겼다.
 
[[1990년]] [[터키]] 프로 축구 팀 [[페네르바체 SK|페네르바체]]의 감독으로 잠시 재임했지만 1년 후 그만두고 [[스페인]]의 강호 [[발렌시아 CF]]의 감독으로 갔다. 히딩크는 여기서 의견을 서슴없이 말하는 성격을 드러냈다. 한 번은 경기 중 발렌시아의 메스탈라 스타디움에 인종 차별적 구호가 적혀 있자 경기 중에 이를 없애도록 지시하였다. 히딩크가 구사하는 공격 스타일의 축구는 발렌시아 팬들뿐 아니라 [[스페인]] 리그의 다른 팀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1990년]] [[터키]] 프로 축구 팀 [[페네르바체 SK|페네르바체]]의 감독으로 잠시 재임했지만 1년 후 그만두고 [[스페인]]의 강호 [[발렌시아 CF]]의 감독으로 갔다. 히딩크는 여기서 의견을 서슴없이 말하는 성격을 드러냈다. 한 번은한번은 경기 중 발렌시아의 메스탈라 스타디움에 인종 차별적 구호가 적혀 있자 경기 중에 이를 없애도록 지시하였다지시했다. 히딩크가 구사하는 공격 스타일의 축구는 발렌시아 팬들뿐 아니라 [[스페인]] 리그의 다른 팀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및 이후 행적 ===
히딩크가 [[1995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었을 때 가장 큰 도전은 각기 뛰어난 선수들로 구성된 팀 내의 분란이었다. [[유로 1996]] 토너먼트에서 [[엣하르 다비츠|다비즈]]는 그와 말다툼 끝에 선발에서 제외시키기도 하였다했다. 그러나 이러한 내분을 잘 수습하여, [[1998 FIFA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벨기에]],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와 무승부를 거두었으나, 2차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에 5-0 대승을 거둬 16강에 진출한 뒤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를 물리치고 4강까지 진출하였다진출했다. 그러나 준결승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에 승부차기끝에 패배하고 [[크로아티아 축구 국가대표팀|크로아티아]]와의 [[3-4위]]전에서도 패해 4위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후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 사임하였다사임했다.
 
바로 뒤이어 [[레알 마드리드 CF|레알 마드리드]]에서 역사상 최초로 도요타컵을 우승시켰지만 구단 수뇌부와 마찰과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당했다. [[레알 베티스]]에서도 많은 기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는 결국 [[네덜란드]]로 돌아갔고 서서히 축구계에서 잊혀져 야인이 되는 듯했다. 그러다가 [[2000년]] 말 [[대한축구협회]]로부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았고, 고심 끝에 승낙하였다.
 
바로 뒤이어 [[레알 마드리드 CF|레알 마드리드]]에서 역사상 최초로 도요타컵을 우승시켰지만 구단 수뇌부와 마찰과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당했다. [[레알 베티스]]에서도 많은 기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는 결국 [[네덜란드]]로 돌아갔고 서서히 축구계에서 잊혀져 야인이 되는 듯했다. 그러다가 [[2000년]] 말 [[대한축구협회]]로부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았고, 고심 끝에 승낙하였다승낙했다.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파일:2004 guuseum.jpg|thumb|right|네덜란드 [[파사펠트]]의 히딩크 박물관. 지금은 철거되었다.]]
 
[[2002년 FIFA 월드컵]] 이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4회 연속으로 [[FIFA 월드컵]]에 진출하였으나진출했으나 본선에서 한 경기도 승리하지 못하고 4무 10패의 초라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게다가 월드컵을 2년 앞둔 [[2000년]]까지도 [[시드니 올림픽]] 축구 조별리그 탈락, [[2000년 AFC 아시안컵|아시안컵]] 3위의 성적을 기록하는 등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반면 공동 개최국인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일본]]은 시드니 올림픽 축구 8강과 아시안컵 우승을 기록하는 등의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어 [[대한민국]] 축구 팬들의 우려는 증폭되었다.
 
이에 [[대한축구협회]]는 [[허정무]] 감독을 경질하고 외국인 감독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가장 유력한 후보로는 [[1998년 FIFA 월드컵|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개최국이자 우승국인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의 감독을 맡았던 [[에메 자케]]였으나 본인의 고사로 인해 영입에 실패하였고, 다음 순위는 [[1998년 FIFA 월드컵|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대한민국]]에 5-0의 참패를 안겼던 거스 히딩크였다. 마침 히딩크 본인도 [[1998년]] 이후 부진한 성적을 안고 있던 터라, 월드컵 개최국인 [[대한민국]]의 감독직에 도전하는 것을 받아들여 [[2000년]] 12월에 정식 계약을 하게 되었으며<ref>{{웹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9&aid=0000074430|제목=히딩크, 축구 대표팀 감독 수락|저자=매일경제|날짜=2000/12/7|확인일자 = 2008/06/22}}</ref> [[2001년]] [[1월 1일]] 거스 히딩크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공식 취임하였다.
 
이에 [[대한축구협회]]는 [[허정무]] 감독을 경질하고 외국인 감독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가장 유력한 후보로는 [[1998년 FIFA 월드컵|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개최국이자 우승국인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의 감독을 맡았던 [[에메 자케]]였으나 본인의 고사로 인해 영입에 실패하였고, 다음 순위는 [[1998년 FIFA 월드컵|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대한민국]]에 5-0의 참패를 안겼던 거스 히딩크였다. 마침 히딩크 본인도 [[1998년]] 이후 부진한 성적을 안고 있던 터라, 월드컵 개최국인 [[대한민국]]의 감독직에 도전하는 것을 받아들여 [[2000년]] 12월에 정식 계약을 하게 되었으며<ref>{{웹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9&aid=0000074430|제목=히딩크, 축구 대표팀 감독 수락|저자=매일경제|날짜=2000/12/7|확인일자 = 2008/06/22}}</ref> [[2001년]] [[1월 1일]] 거스 히딩크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공식 취임하였다취임했다.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대한 구조조정 ====
히딩크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자마자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하였다했다.
* 공격수 부분에서 [[이동국]]을 과감히 제외하고 그 자리에 [[설기현]]으로 대체하였다대체했다. [[설기현]]은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02년 FIFA 월드컵]] 16강전 때 [[이탈리아]]를 상대로 0-1로 뒤진 상황에서 후반 43분에 동점골을 기록하여 연장전까지 끌고 갔으며 결국 [[안정환]]의 골든 골로 [[이탈리아]]를 상대로 승리하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8강에 진출시켰다.
* [[고종수]]가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하차하자 그 자리를 [[박지성]], [[송종국]] 등으로 대체하였다대체했다. 이후 [[박지성]]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구 선수가 되었다.
* [[홍명보]]를 제외시켰으나 추후 다시 국가대표팀에 포함시켰다. 이후 [[홍명보]]가 지도자가 되었을 때 히딩크의 옆에서 안지의 어시스턴트 코치를 맡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 각 선수들에게 자신의 원래 포지션 이외의 다른 포지션도 소화해낼 수 있는 특별훈련과 체력 훈련을 병행시켰다. 이 결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2002년 한일월드컵 준결승에 진출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 2002 FIFA 월드컵 이전 ====
[[2001년]] 히딩크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정식 행보를 시작하였다시작했다. 첫 무대는 [[홍콩]] 칼스버그컵이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노르웨이 축구 국가대표팀|노르웨이]]에 2-3으로 패배하고,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파라과이]]에 승부차기로 승리를 거두어 3위를 기록하였다기록했다.<ref>{{웹 인용|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0050744&|제목 = -칼스버그컵축구- 히딩크호, 천신만고끝 첫 승(종합)|저자 = 연합뉴스|날짜=2001/1/27|확인일자=2008/6/22}}</ref>
 
[[20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이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개최되었는데, [[대구스타디움|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개막전에서 [[대한민국]]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에 5-0으로 대패하고 말았다.<ref>{{웹 인용|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8&aid=0000075957&|제목 = <nowiki>[컨페드컵]</nowiki> 한국축구, 프랑스에 0-5 참패 |저자 = 한국일보|날짜 = 2001/05/30|확인일자 = 2008/06/22}}</ref>
 
그러나 히딩크는 이것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강팀과의 경기를 함으로써 객관적인 실력 차이를 확인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일부 언론과 축구 팬들 사이에서 서서히 히딩크 경질론이 나오기 시작하였고시작했고, 급기야는 8월 [[체코]] 원정 평가전에서 또 5-0으로 대패하면서 히딩크 경질론이 급부상하게 되었다.<ref>{{웹 인용|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0092717&|제목=-한.체코평가전- 한국, 유럽징크스 재확인|저자=연합뉴스|확인일자=2008/6/22|날짜=2001/8/16}}</ref><ref>{{웹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0&aid=0000082087&|제목=<nowiki>[축구]</nowiki>히딩크 능력 체코전 대패후 비난-옹호론 팽팽|확인일자=2008/06/22|저자 = 동아일보|날짜=2001/8/26}}</ref> 그렇지만 [[대한축구협회]]의 [[정몽준]] 회장은 히딩크 감독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경질론을 일축하였다일축했다.<ref>{{웹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8&aid=0000095233&|제목=<nowiki>[대표축구]</nowiki> 축구협, 히딩크에 힘 실어주기 |저자=한국일보|확인일자=2008/6/22|날짜=2001/8/29}}</ref><ref>{{웹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8&aid=0000095794&|제목=<nowiki>[대표축구]</nowiki> 정몽준-히딩크 '16강 대책 기내 회동' |저자=한국일보|확인일자=2008/6/22|날짜=2001/8/31}}</ref> [[2001년]] [[11월 10일]], 마침내 주 경기장인 [[서울월드컵경기장]]이 개장되었고, [[대한민국]]은 [[크로아티아 축구 국가대표팀|크로아티아]]와의 2차례 친선 경기에서 1승 1무를 기록하였다기록했다.
 
한편, [[대한민국]]은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폴란드]],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포르투갈]],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과 D조에 편성되었다. [[2002년]], [[대한민국]]은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와의 원정 평가전과 북중미 골드컵에 초청팀 자격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루과이]]전에서는 2-1 패배, 그리고 북중미 골드컵에서는 [[미국]]과 [[캐나다]]에 1-2로 패하고 최약체 [[쿠바]]와 0-0 무승부를 기록하는 등의 부진한 모습을 보여 또 다시 불안감을 갖게 하였다. 월드컵 첫 경기가 불과 4개월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축구팬들로서는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02년 3월 이후,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터키]]와 0-0 무승부, [[핀란드 축구 국가대표팀|핀란드]]에 2-0으로 승리한 이래로, 4월 [[코스타리카 축구 국가대표팀|코스타리카]]전 2-0 승리, [[중화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중국]]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계속해서 무패 행진을 기록하고, [[5월 16일]]에는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스코틀랜드]]를 상대로 4-1의 대승을 거두었다. [[5월 21일]] 서귀포에서 열렸던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박지성]]의 동점 골로 경기는 결국 1-1 무승부로 끝났다. [[5월 26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최종 평가전 상대는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였다. 한국은 2-3으로 패배하였지만패배했지만 이 경기는 한국 축구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 2002년 FIFA 월드컵 ====
[[2002년 FIFA 월드컵]]이 개막한 이후, 히딩크는 [[6월 4일]]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폴란드]]전에서 [[황선홍]]과 [[유상철]]의 연속골로 2-0으로 승리하여 한국의 월드컵 사상 첫 승을 안겨주었다. 6월 10일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전에서는 시종일관 유리한 경기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이을용]]이 페널티킥을 실축하는 등, 수많은 골 기회를 놓쳐 1-1 무승부를 거두었으나, 6월 14일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포르투갈]]전에서 [[박지성]]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하여 2승 1무로 D조 1위를 기록해 한국 축구는 사상 최초로 피파 월드컵 16강에 진출하였다진출했다.
 
이로 인한 한국 국민들의 열광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히딩크 본인은 아직 배가 고프다는 말로 다음 경기를 준비하였고준비했고, 6월 18일 16강전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와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전반 7분경 [[안정환]]이 페널티킥을 실축해 결국 전반 18분에 [[크리스티안 비에리]]에게 선제골을 허용한 뒤, 이탈리아의 수비에 고전하자 히딩크는 후반 중반 이후 수비수 전원을 벤치로 불러들이고 공격수들만 투입하는 도박을 감행하였다감행했다. 결과적으로 이 작전은 성공하여 후반 종료 직전 [[설기현]]이 동점골을 넣었고, 연장 후반 12분에는 [[안정환]]이 역전 골든골을 넣어 이 대회에서 아시아 팀으로는 2번째로 8강에 진출하였다진출했다.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과의 8강전에서도 전·후반과 연장을 모두 0-0으로 마무리하고, 승부차기에서 5-3으로 승리하여, 월드컵 사상 최초로 아시아 팀이 4강에 진출하는 새 역사를 기록하였다기록했다.
 
6월 25일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 [[미하엘 발라크]]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결승 진출에는 실패하였다실패했다. 6월 29일에 열린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터키]]와의 3-4위전에서도 전반에 대량 실점을 기록하며 2-3으로 패배하여 4위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16강 진출조차 어려워보였던 [[대한민국]] 팀을 4위에 올린 것은 히딩크 자신도 놀란 대단한 성과였다.
 
이런 공로로 히딩크는 대한민국 최초의 명예 국민이 되었고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다음 월드컵까지 그를 감독으로 앉히자는 말이 있었고, 히딩크 본인 역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잔류를 희망한다는 의중에 무게를 싣는 듯한 발언을 했었지만, 결국 재계약하지 않고 네덜란드의 프로 팀 [[PSV 에인트호번]]을 맡게 되어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박지성]]과 [[이영표]]를 PSV에 영입하게 된다.
 
그 후에도 히딩크는 유독 [[대한민국]]을 자주 방문하고, 한국 기업의 CF 제의를 수락하는 등, 한국에 남다른 애정을 과시하고 있다. 이는 1998년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한 채 야인으로 전락해가던 자신의 위상이 대한민국 대표팀을 맡으면서 높아졌기 때문이다.
 
=== PSV 에인트호번 ===
[[파일:Hiddink.jpg|thumb|right|200px|거스 히딩크, [[2007년]] [[6월 7일]] [[크로아티아 축구 국가대표팀|크로아티아]]와의 경기를 앞두고 [[모스크바]] [[도모데도보 국제공항]]에서.]]
 
월드컵 이후 히딩크는 고향으로 돌아가 [[PSV 에인트호번]]의 감독을 맡았다. 그리고 그는 [[PSV 에인트호번]]에 [[박지성]]과 [[이영표]]를 영입하였다영입했다. [[에레디비시]]에서 2002-03, 2004-05, 2005-06 시즌을 내리 우승하였다우승했다.
 
또한, [[UEFA 챔피언스리그 2004-05]]에서 에인트호번은 [[UEFA 챔피언스리그]]가 지금의 형태로 바뀐 1992-93 시즌 이래 처음으로 준결승에 진출하였다. (PSV는 [[1988년]]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안컵을 차지했다.) PSV는 준결승 [[AC 밀란]]과의 경기에서 합계 3-3을 기록하였으나,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탈락하였다.
 
또한, [[UEFA 챔피언스리그 2004-05]]에서 에인트호번은 [[UEFA 챔피언스리그]]가 지금의 형태로 바뀐 1992-93 시즌 이래 처음으로 준결승에 진출하였다진출했다. (PSV는 [[1988년]]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안컵을 차지했다.) PSV는 준결승 [[AC 밀란]]과의 경기에서 합계 3-3을 기록하였으나기록했으나,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탈락하였다탈락했다.
===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2005년]] [[7월 22일]], 히딩크는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을 수락하였고수락했고, PSV와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동시에 지휘할 거라고 발표하였다발표했다.
 
이후 남미 5위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와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원정 0-1 패배, 홈 1-0 승리를 거두어, 승부차기에서 4-2로 이기며 오스트레일리아의 1974년 서독 월드컵 이후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성공시켰다.
 
[[2006년 FIFA 월드컵]] 본선에서 호주는 브라질, 크로아티아, 일본과 함께 F조에 속하였다속했다. 일본과의 첫 경기에서는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인해 선제골을 허용하였지만허용했지만 후반 40분 이후 3골을 몰아넣으며 3-1로 역전승을 거뒀다. 브라질과의 경기에서는 선전하였지만 0-2로 패배하였고패배했고, 마지막 크로아티아와의 경기에서는 2-2 무승부를 거둬 브라질에 이어 1승 1무 1패로 16강에 진출하였다진출했다.
 
16강에서 맞붙은 팀은 지난 대회에서도 히딩크가 맞붙었던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였다. 호주는 이탈리아를 맞아 대등하게 선전하며 후반까지 0-0을 기록하여 연장전으로 가는 듯하였지만, 후반 추가시간 종료 직전 [[프란체스코 토티|토티]]의 페널티킥 성공으로 패해 8강 진출이 좌절되었다.
 
===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
[[2006년]] [[4월 14일]], 히딩크는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수락하였다수락했다. 계약의 상세 내용은 2년 6개월의 계약기간과 240만 달러의 연봉을 받고, 성과에 따라 계약 기간을 추가로 2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2006 FIFA 월드컵]]이 끝난 이후, 히딩크는 러시아의 감독직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8월 16일]], 히딩크는 [[라트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라트비아]]와의 친선전을 통해 러시아 국가대표팀에서의 공식 첫 경기를 치렀다.
 
[[UEFA 유로 2008]] 예선에서 E조에 편성된 러시아는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를 승점 1점차로 따돌리고 조 2위를 차지하여 [[유로 2008|본선]]에 진출하였다. 히딩크는 [[러시아]]와 계약기간을 [[2010년]]까지 연장하였다.<ref>{{웹 인용|제목=Hiddink pens new Russia deal|url=http://www.skysports.com/story/0,19528,12010_3344674,00.html|저자=skysports.com| 날짜=2008/3/25}}</ref> 물론 이것이 히딩크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와 공동 감독직을 수락할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UEFA 유로 2008]] 예선에서 E조에 편성된 러시아는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를 승점 1점차로 따돌리고 조 2위를 차지하여차지해 [[유로 2008|본선]]에 진출하였다진출했다. 히딩크는 [[러시아]]와 계약기간을 [[2010년]]까지 연장하였다연장했다.<ref>{{웹 인용|제목=Hiddink pens new Russia deal|url=http://www.skysports.com/story/0,19528,12010_3344674,00.html|저자=skysports.com| 날짜=2008/3/25}}</ref> 물론 이것이 히딩크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와 공동 감독직을 수락할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히딩크가 이끈 러시아는 본선 조별리그에서 D조 2위를 차지하여 8강에 올랐다. [[2008년]] [[6월 21일]]에 펼쳐진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3-1로 승리하여 4강에 진출하였으나, 그 이후 4강전에서 우승국이기도 한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과의 경기에서 0-3으로 패배하였다.
 
히딩크가 이끈 러시아는 본선 조별리그에서 D조 2위를 차지하여 8강에 올랐다. [[2008년]] [[6월 21일]]에 펼쳐진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3-1로 승리하여 4강에 진출하였으나진출했으나, 그 이후 4강전에서 우승국이기도 한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과의 경기에서 0-3으로 패배하였다패배했다.
[[2010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4조에서 2위를 차지하여 플레이오프를 치렀으나, [[슬로베니아 축구 국가대표팀|슬로베니아]]에게 [[원정 다득점 원칙]]에서 밀려 러시아는 예선 탈락하였다.
 
[[2010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4조에서 2위를 차지하여 플레이오프를 치렀으나, [[슬로베니아 축구 국가대표팀|슬로베니아]]에게 [[원정 다득점 원칙]]에서 밀려 러시아는 예선 탈락하였다탈락했다.
=== 첼시 FC ===
[[첼시 FC]]의 감독이었던 [[루이스 펠리피 스콜라리]]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해임되었다. [[첼시 FC]]의 구단주인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평소에 친분이 있던 히딩크 감독을 설득시켰고, 히딩크는 남은 시즌 동안만 감독직을 이행하는 조건으로 [[2009년]] [[2월 11일]]부터 첼시의 감독직에 앉게 되었다.
 
히딩크는 [[UEFA 챔피언스리그 2008-09|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유벤투스 FC|유벤투스]]를 3-2로 물리쳐 첼시를 8강에 진출시키고, 8강전에서 [[리버풀 FC|리버풀]]을 7-5로 제압하여 첼시를 4강에 진출시켰다. 첼시는 [[FC 바르셀로나]]와의 준결승전에서 원정 1차전은 수비적인 전술을 펼치며 0-0으로 마치고, 홈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 전반 [[마이클 에시엔]]의 선취골로 1-0으로 앞서가는 등 결승 진출을 눈앞에 두었으나, 심판 [[톰 헨닝 외브레뵈]]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인해 불안한 경기를 이어나갔고, 결국 경기 종료 직전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에게 동점골을 허용해 1-1로 무승부를 거두어,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결승 진출에 실패하였다실패했다.
 
첼시는 스콜라리 해임 당시 리그 4위의 위치도 위태로운 상태였으나, 히딩크가 부임한 이후로는 3위의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또한 히딩크가 이끄는 첼시는 [[FA컵]] 결승전에서 2-1 역전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가 남긴 이러한 성과들로 인해 수많은 팬들을 비롯하여 코칭 스탭, 구단주, 선수들까지 그의 잔류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결국 이 경기 이후 히딩크는 계약대로 첼시를 떠나게 되었다.
 
첼시는 스콜라리 해임 당시 리그 4위의 위치도 위태로운 상태였으나, 히딩크가 부임한 이후로는 3위의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했다. 또한 히딩크가 이끄는 첼시는 [[FA컵]] 결승전에서 2-1 역전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하였다차지했다. 그가 남긴 이러한 성과들로 인해 수많은 팬들을 비롯하여 코칭 스탭, 구단주, 선수들까지 그의 잔류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주장했으나 결국 이 경기 이후 히딩크는 계약대로 첼시를 떠나게 되었다.
===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과 이후 ===
히딩크의 터키는 유로 2012 예선에서 독일과 함께 조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11월 11일, 15일 크로아티아와 홈/원정에서 경기를 치룬 결과 터키는 플레이오프 1차전 홈에서 크로아티아에게 3-0으로 패배하였다패배했다. 플레이오프 2차전 크로아티아 원정에서 0-0으로 비기며 합계 3-0으로 크로아티아에게 밀려 [[유로 2012]] 진출에 실패하였다실패했다.
 
결국 성적 부진을 이유로 터키에서 경질된 이후, 히딩크는 러시아의 [[FC 안지 마하치칼라]]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과 이후 ===
[[2014년 FIFA 월드컵]] 이후, [[루이스 판 할]] 감독의 뒤를 이어 다시 한 번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유로 2016 예선 [[체코 축구 국가대표팀|체코]]에 1-2, 아이슬란드에 0-2, 평가전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에게 0-2, 멕시코에 2-3로 패배하며 경질위기에 부진한 성적을 보여주었다. 결국 2015년 6월 29일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났으며, 후임으로 [[다니 블린트]]가 부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