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오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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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쉰의 군대가 패하여 복벽이 무산되자, 장쉰 토벌군을 이끈 돤은 공화국 재건을 모토로 다시 정권을 잡고 무력으로 전국을 통일하려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돤은 다시 대총통으로 오른 [[펑궈장]](馮國璋)과 대립하게 되었다. 자신이 직계 군벌인 차오쿤은 도리어 완계 군벌과 관계가 애매했다. 비록 그는 "남북정전을 제의하는 성명"(《通电倡议南北停战》)을 발표하였지만, 부총통을 시켜주겠다는 돤의 유혹에 넘어가서 최종적으로 돤의 완계 군벌로 전향했다.
 
그렇지만 펑궈장, 돤치루이와 마찬가지로 차오쿤은, [[쑨원]](孫文)이 [[광저우 시|광저우]]에서 벌이던 [[구국회]](舊國會)와 호법운동(護法運動)에는 반대하였다.
 
이렇게 북양 군벌과 남방의 쑨원의 갈등은 증폭되어 결국 [[호법전쟁]]이 터졌다. 이 해에 그는 상장(上將:한국의 대장에 해당)의 군계급을 받았다. 1918년 2월 차오는 군대를 이끌고 후베이, 후난으로 가서 북양 군벌에 반대하는 후난 성의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펑궈장 사후, 다른 직계군벌인 [[리순]]이 멀리 [[창 강]] 유역에서 있었기 때문에, 차오는 일약 직계 군벌의 영수가 되었다. 1920년 직계군벌과 완계군벌이 싸운 직완전쟁에서 직계 군벌이 승리하였다. 또한 1922년 직계와 봉계가 싸운 제1차 직봉전쟁에서도 직계가 승리하여 봉계 군벌은 [[만주]]로 패주하였다. 그리하여 직계군벌은 베이징 정부를 장악한 유일한 군사집단이 되었다. 그리하여 차오는 탄탄한 정치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으며, 자신을 따르는 진보파(津保派)는 정치파벌을 형성하여, 돤치루이가 제안한 부총통에 머무르지 않고, 합법적으로 총통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