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17번째 줄:
 
[[파일:KamakuraDaibutsu3947.jpg|thumb|left|[[가마쿠라 대불]]]]
많은 역사 유적을 가진 '고도(古都)'임에도 불구하고 [[무로마치 시대|무로마치]](室町) 중기 이후로 쇠퇴, '도시'로서의 가마쿠라의 역사는 이어지지 못했다. [[에도 시대|에도]](江戶) 후기에는 지역 내의 신사와 사찰에 많은 참례객이 모여들기도 했지만, [[메이지 시대|메이지]](明治) 초기까지도 이른바 가마쿠라 대불([[고토쿠인]]高德院)이나 하세사(長谷寺)를 포함한 하세 지구에만 도시적인 취락이 분포하고 있었을 뿐, 지금과 같은 가마쿠라 시의 중심 시가지는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메이지 초기에 지금의 가마쿠라 시역을 포함한 가마쿠라 군을 관할하는 군 관공서가 도쓰카(戶塚, 지금의 요코하마 시 [[도쓰카 구]])에 설치되었다. 메이지 중기 이후로는 주로 휴양지, 별장지로서 [[쇼와 시대|쇼와]](昭和) 이후 관광지로서 거듭 '도시'로서의 가마쿠라는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중세 이래의 도시 경관이라고 할 수 있는 건조물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대신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높은 중세 도시의 옛 건조물이 많은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29번째 줄:
1225년에 [[싯켄]](執權)이 된 [[호조 야스토키]](北條泰時)는 렌쇼(連署)나 효조슈(評定衆)를 두어 막부 내의 합의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정권의 중심지를 요리토모 이래의 오오쿠라(大倉)에서 우쓰노미야즈시(宇都宮辻子)로 옮겼다. 1232년에는 무사의 관습법을 성문화한 고세이바이시키모쿠(御成敗式目)를 제정해 막부의 체제를 다졌다. 1333년에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의 막부 타도 계획에 호응한 [[고즈케 국]](上野國, 지금의 [[군마 현]])의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는 분바이가와라(分倍河原) 등지에서 가마쿠라 막부를 좌지우지하던 호조 집안의 군사를 격파하고 가마쿠라로 진격해 야스토키 이래의 호조 집안의 보리사(菩提寺)였던 도쇼사(東勝寺)에서 호조 집안을 멸망시켰다(1953년의 도쇼사 조사에서는 무수히 많은 자상을 입은 인골이 발굴되기도 했다).
 
[[겐무 신정]](建武新政)이라 불리는 천황 친정이 시작되면서 교토로 소환된 요시사다 대신으로 앞서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 같은 옛 가마쿠라 막부의 관인들을 멸하는 등 막부 타도에 많은 공을 세웠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나 그 일족인 호소카와(細川) 집안 등이 친왕을 받들어 가마쿠라쇼군부(鎌倉將軍府)가 성립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조 집안의 잔당들이 일으킨 나카센다이의 난으로 가마쿠라가 함락되자 다카우지는 토벌을 위해 나섰지만, 이후 군사를 돌려 천황의 신정체제에 반기를 들고 가마쿠라에서 독자적인 논공행상을 행했으며, 자신을 추토하러 나선 요시사다 등을 쳐부수고 교토에서 북조를 세워 새로운 무가정권을 수립, 가마쿠라에는 자신의 아들 요시아키라(義詮)를 파견했다. 하지만 집안 내부의 다툼이 간노(觀應)의 요란(擾亂)이라 불리는 내전으로까지 발전하면서 요시아키라는 교토로 소환되었고 대신 다카우지의 둘째 아들 모토우지가 가마쿠라에 파견되어 [[가마쿠라 부]]가 설치, 이후 [[가마쿠라 구보]](鎌倉公方)로써 간토를 통치하게 되었다.
 
가마쿠라 구보는 이후 무로마치 막부와 대립하게 되었는데, 가마쿠라 구보를 보좌하는 [[간토 관령]]과도 대립이 생겨 우에스기 젠슈(上杉禪秀)의 난, 에이쿄(永享)의 난, 유키 전투(結城合戰) 등의 소란이 일어난다. 1455년에는 [[교토쿠의 난]]으로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시모우사 국]]의 고가로 옮겨 [[고가 구보]]를 세우면서 가마쿠라는 쇠퇴한다. [[센고쿠 시대]]에는 오다와라의 [[호조 소운]](北條早雲)이 가마쿠라에 진출, 다마나와 성을 쌓아 동쪽 사가미의 거점으로 삼았는데, 아와의 사토미 집안이나 [[우에스기 겐신]](上衫謙信),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등에게 종종 침공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격퇴하였다. 호조 집안이 멸망한 뒤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39번째 줄: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간토 대지진]]으로 가마쿠라도 큰 피해를 입었다.
 
쇼와 시대에 들어 가마쿠라는 예술가들의 도시가 되었다. 이미 [[1889년]](메이지 22년)에 [[요코스카 선]](横須賀線)이 개통되어 가마쿠라가 수도 도쿄(東京)의 통근권역에 들게 되었기에 도쿄에 소재지를 두었던 출판사와도 오가기 용이했을 뿐 아니라, 간토 대지진의 피해가 극심했던 도쿄를 떠나 일본의 저명한 작가나 문인 가운데 일부가 도쿄에 비하면 그나마 피해도가 덜한 편이었던(물론 [[쓰루가오카하치만구]]의 붕괴 등 가마쿠라가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가마쿠라로 이주하고, 패전 뒤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구메 마사오(久米正雄), 다카미 슌(高見順)이나 나카야마 기슈(中山義秀) 등이 이곳에서 대본실(貸本屋) 「가마쿠라 문고(鎌倉文庫)」를 꾸리는 등 '가마쿠라 문사(文士)'라는 단어까지 생겨났다.<ref>다만 현재는 문사(文士)라는 단어 자체가 일본 내에서도 사어(死語)가 되고, 가마쿠라 문사라는 말도 쓰이지 않는다. 21세기에 들어 일본의 많은 유명 작가들이 가마쿠라로 이주해 40년만에 가마쿠라 펜클럽이 부활하는 등 신(新) 가마쿠라 문사라 불릴만한 작가층이 탄생하기도 하는 등, 가마쿠라에 체재하는 고명한 문학자도 적지 않다. [[재일]] 출신의 일본 소설가 [[김윤규]](일본명 다치하라 마사아키)와 [[유미리]]도 대표적인 가마쿠라 문사로 꼽힌다.</ref>
 
[[1936년]](쇼와 11년)에는 일본의 영화ㆍ연극 회사인 마쓰타케(松竹)가 촬영소를 가마타에서 오후나로 옮겨 '오후나 촬영소'가 개설되면서 영화 관계자로서 가마쿠라로 옮겨 사는 사람이 늘어났다. [[1939년]]에 가마쿠라 정과 고시고에 촌이 합병되어 가마쿠라 시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1928년]](쇼와 3년)의 가마쿠라야마의 분양(鎌倉山)을 시작으로 [[1930년]](쇼와 5년)의 요코스카 선 열차의 전철화 이후, 패전 뒤까지 가마쿠라에서는 대규모의 주택 개발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도쿄 근교의 주택지로서의 성격이 강해져 갔다. 특히 일본의 고도 경제성장기 대규모 개발의 물결은 '쇼와의 가마쿠라 공격'이라고까지 불릴 정도이다. 이 무렵에 일어난 [[쓰루가오카 하치만구]](鶴岡八幡宮) 뒤편의 '미타니(御谷)' 계곡의 개발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작가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를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은 이후 일본에서 고도보존법(古都保存法)을 제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81번째 줄:
 
== 바깥 고리 ==
{{commonscat위키공용분류|Kamakura, Kanagawa}}
* {{언어고리|ko}} [http://guide.city.kamakura.kanagawa.jp/korean/index.htm 가마쿠라 시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