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위씨: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문단 이름 변경 (주석 → 각주)
편집 요약 없음
5번째 줄:
| 중시조 = 위조 (韋組)
| 집성촌 =
| 인물 = [[위정]], [[위근영]], [[위득유]], [[위원]], [[위수징]], [[위상식]], [[위상균]], [[위현석]], [[위창수]]
| 년도 = 2000
| 인구 = 1,805명
25번째 줄:
 
== 인물 ==
* [[위정]](韋靖) : [[고려 정종]] 때 대장군을 지내고, 1049년(고려 문종 3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임명되었다.<ref>[http://termsdb.naverhistory.comgo.kr/id/entry.nhn?docId=1623953 kr_007r_0050_0030_0030 『고려사』 권7, 문종 3년(1049) 기축년]</ref>
* [[위근영]](韋瑾英) : 고려 인종 때 소감(少監)을 역임했다.
* [[위원]](韋元) : 고려 문신. [[1225년]]([[고려 고종]](高宗) 12년) 문과에 급제하여 평장사를 역임했다.
* [[위득유]](韋得柔, ? ~ 1278년) : 고려 무신. [[고려]] [[충렬왕]] 때 대장군을 역임했다. 위득유는 병마지사가 되어 일본 정벌에 나갔다가 이키섬(壹岐島)에서 태풍을 만나 되돌아왔다. 이때 익사한 김신을 구출하지 않은 혐의로 도원수 김방경의 탄핵을 받았다. 원나라에서 합포(合浦)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을 설치하고 제1차로 일본을 정벌할 때, 지병마사로 참전하였다. 여·원연합군은 쓰시마섬[對馬島]을 공략한 후 일본 본토로 향하던 도중 규슈[九州]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이 때 위득유는 김신(金侁)을 구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김방경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277년 김방경에게 반감을 갖고 있던 노진의(盧進義)·김복대(金福大) 등과 모의하여 김방경이 반란을 꾀하기 위해 무기를 감춰두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그 결과 [[김방경]]은 홍다구(洪茶丘)에 의해 모진 고문을 받고 대청도로 유배되었고, 1278년(충렬왕 4) 위득유는 홍다구의 후원으로 상장군에 올랐다.
 
* [[위수징]](韋壽徵, 1653년 ~ ?) : [[조선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 [[성균관]] 전적을 역임했다.
* [[위상식]](韋相植, 1932년 ~ ) : 보르네오가구 사장
 
* [[위상균]](韋相均, 1938년 ~ ) : 동서가구 사장
* [[위상봉]](魏相烽, 1955년 ~ ) :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전기공학전공 교수
* [[위현석]](韋賢碩, 1966년 ~ ) :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변호사
* [[위창수]](1972년 ~ ) : 골프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