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플램스티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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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더비셔 주]]의 작은 마을 덴비에서 스티븐 플램스티드와 그의 첫 아내 메리 스파드먼의 아들로 태어났다. [[더비]]의 한 학교에서 1662년 5월까지 라틴어와 역사를 공부하였다.<ref name=birks>Birks, John L. (1999) ''John Flamsteed, the first Astronomer Royal''. London, Avon Books. ISBN 0-7503-0147-3</ref>{{rp|3-4}}
 
더비의 교장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지저스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으나, 만성적인 건강 문제로 몇 년간 진학을 미루었다. 집에 머무르며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고, 이 때 산술과 분수 계산법 등을 배우고 수학과 천문학에 호기심을 보인다. 1662년 7월에는 13세기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데 사크로보스코]]의 저서 《[[천구론]]》(''De sphaera mundi'')를 읽고 크게 감명받았는 사실을 그의 일기로부터 알 수 있다. 1662년 9월 12일에는 생애 처음으로 부분 [[일식]]을 관측하였다. 1663년 초에는 Thomas Fale의 저서 《''The Art of Dialling''》를 읽고 [[해시계]]에 관심가지게 되었다. 1663년 여름에는 Wingate의 ''Canon'', William Oughtred의 ''Canon'' 등 대포에 관한 서적들, 다시 시계에 관한 Thomas Stirrup의 ''Art of Dialling''을 읽었다. 또한 Thomas Street의 《''Astronomia Carolina''》, 이른바 '천체의 운동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공부하였다. 천문학에 관심가진 지역 유지들과 폭넓게 사귀었다.사귀었는데, 지역 유지들의 서제를 드나든 결과 [[제레미야 호록스]]의 천문표를 수록한 서적들을 접할 수도 있었고 [[아이작 뉴턴]] 역시 그러했듯 호록스의 저작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ref name=birks/>{{rp|8–11}} 훗날 그가 달의 위치를 계산할 때 호록스의 이론을 개선하여 자신이 개발한 독자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중요한 접점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가 되던 1665년 10월 ''Mathematical Essays''라는 제목의 첫 번째 논문을 작성하였는데, 천문관측용 사분의를 설계하고 제작, 사용하는 방법과 더비 지역에서의 그 관측 결과를 다루고 있다.<ref name=birks/>{{rp|11}}
 
플램스티드는 1670년 9월에야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방문하여 지저스 대학에 등록하였다. 캐임브리지에 주로 거주하지는 않았지만 1674년에는 뉴턴의 루카스 석좌강의를 듣기 위해 두 달간 그곳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ref name=birks/>{{rp|11}}
 
사재로 임명되어 플램스티드는 더비셔에서 생활을 꾸리려고 하고 있을 때 그의 후원자인 조너스 무어(Jonas Moore)가 그를 런던으로 초대하였다. 무어는 최근에 [[왕립학회]]에 새로운 천문대를 건설하기 위한 자금을 요청 중이었고, 왕립학회는 당시 제기되던 경도를 결정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문대의 건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찰스 2세에게 간청했다. 그 요청은 국왕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런데 찰스 2세는 프랑스의 브리타니에서 온 포츠머스 공작부인 루이즈 드 크로알레(Louise de Kérouaille, Duchess of Portsmouth)를 애인으로 사귀고 있었고, 그녀는 자기가 아는 르시에 드 생 피에르(Le Sieur de St. Pierre)라는 아마추어 천문학자가 달의 위치로부터 경도를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국왕은 그녀의 말에 따라 1674년 12월 왕립위원회에 생 피에르의 주장을 조사하도록 명령했고, 그동안 무어의 계획은 선수를 빼았긴 셈이다. 왕립위원회는 [[크리스토퍼 렌]], [[로버트 훅]], [[윌리엄 브롱커]], [[사무엘 모랜드]], [[존 펠]], Seth Ward, Silius Titus로 구성되어 있었다.
 
플램스티드는 1675년 2월 2일 영국에 도착하여 무어와 함께 [[런던탐]]에서 지냈다. 플램스티드가 천문 관측 경력이 있음을 알아본 위원회의 Titus 덕분에 그는 왕을 알현하게 되었다. 플램스티드는 왕립위원회의 요구로 공식 증인으로 출석하였고, 생 피에르의 주장을 검증할 목적으로 실제 관측자료들을 제시하였다. 플램스티드의 질문으로 생 피에르의 형편없는 천문학 지식이 그대로 드러났다.<ref>데이비드 클라크·스티븐 클라크, 2000 : 뉴욕, 《독재자 뉴턴》, 이면우 옮김, 2002 : 서울, 몸과마음. 57쪽.</ref>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