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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 잡지가 오래 가진 못했어도 나로선 지금도 자랑할 수 있는 잡지예요. 내용도 충실했고 농촌 문화ㆍ농촌 경제의 확충을 위한 사회 사업의 뜻으로 만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태평로 서울신문사 뒤에 있던 4층 빌딩을 없앨 정도로 빚을 졌지요. 그 무렵부터 얻은 당뇨병이 지금도 낫지 않고 있어요. 그러나 《농원》만큼은 다시 복간하고 싶은 의욕을 잠재우지 않을 만큼 뜻깊은 일이었다고 자부해요."
 
== 평가 ==
=== 사회 환원을 원칙으로 한 기업 정신 ===
김익달이 남긴 많은 업적 중에 우리 출판계에서 아직까지도 전설처럼 남아 있는 일화가 있다. 김익달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드러내 주는 일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도 특히 부장급 이상 간부들에게 돌아가며 차례로 집을 사 준 이야기는 지금도 전설처럼 구전되고 있다. 그리고 그 무렵 사원의 대우도 국내 최고 수준이었다고 학원사 출신들은 입을 모은다. 그래서 당시 '학원사 편집국장의 월급이 신문사 편집국장보다 많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김익달이 출판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올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사실 김익달은 몇몇 매체와 출판물을 통해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언제나 새로운 일에 투자하여 사회 환원을 원칙으로 삼아 왔다. 그리고 김익달 자신은 천성적으로 근검·절약하는 성품이라 겨울에도 빛 바랜 외투를 입고 다닐 정도로 생활이 검소했다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회고한다.
 
학원사 부사장을 지낸 바 있는 이규준 씨는 김 선생의 일상 생활을 비교적 가까이에서 보아 온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분의 일상 생활은 지극히 규칙적이고 합리적이며 대단히 검소했다. 공과 사가 분명했고 사치나 허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출판에는 남다른 기지와 정열을 가지고 있었으며 휼빈과 육영에도 사업 의지가 대단했다. 불우한 이웃은 되도록 도와 주되 그 대상은 반드시 자조하는 사람 중에서 선택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러한 생활 정신이 원동력이 되어 회사 운영에도 기업주 위주의 축재나 업체의 확장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종업원의 후생과 복지에도 중점을 두고 거래선과도 공생공영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일반적으로 지급되는 월정급은 물론, 연말이나 추석, 김장철 등에 지급되는 상여금에 이르기까지 보수는 당시 국내 출판업계의 최고 수준이었다."
 
대개 부장이 되고 3~5년쯤 지나면 집을 사 주었다는데, 그 혜택을 입은 사람이 20여 명이나 되었다. 지금도 간부사원에게 주택 구입비를 보조해 주거나 대여해 주는 출판사가 더러 있긴 하지만, 주택난이 지금보다 훨씬 심했던 시절에 집 한 채를 조건 없이 사 주었다는 것은 김익달이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1958년 부터 10여년 간 학원사에 몸담으면서 김익달로부터 주택 구입 혜택을 입었던 박재서 씨(학원출판사 대표)를 통해 다음과 같은 주택 구입 일화를 들어본다.
"1960년대 초에 처음엔 200만 원을 주다가 나중에는 400만 원까지 주었는데, 그땐 그 돈으로 집 한 채를 넉넉히 샀지요. 김 선생이 직접 집을 골라 사 준 일도 있습니다. 나도 그 혜택을 입었는데, 하루는 나를 데리고 불광동 신축 주택가에 가서 나더러 집을 고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기에 돈으로 달래서 그 돈으로 당시 서교동 허허벌판에 땅 240평을 샀습니다. 나중에 그걸 팔아서 집을 샀지요."
 
또한 전 한국출판연구소 소장을 지낸 바 있는 주채원 씨는 1960년대에 학원사에서 근무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라며 다음과 같은 김익달의 기업 정신을 전한다.
 
"제작비 지불 관계로 김 선생이 부채 리스트를 보여 주시는데 거기에는 사원들에게 집 사 줄 액수도 쓰여 있었다. 자금이 남아돌아서 집을 사 주는 게 아니고 빚을 얻어서라도 해야 할 일은 한다는 것이 그분의 소신이었다."
 
이와 함께 김 선생은 자신이 창간한 많은 매체나 출판물들을 독립시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기틀을 잡아 주기도 했다. 이것은 기업이 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사회의 소유물이며, 더불어 살아가면서 도와야 한다는 평소의 기업관을 실천에 옮긴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결국 이것은 오늘날 우리 출판계가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 밑거름이 되는 셈이다.
 
1969년, 《주부생활》의 경우에서도 김익달의 이러한 기업 윤리가 적용된다. 1965년 창간되어 한국 여성지를 주도하던 《주부생활》을 김익달은 학원사가 어려워지자 독립시키기로 결정한다. 그 경위를 살펴보면 대충 이러했다. 김익달은 가지고 있던 빌딩을 팔아서 《주부생활》 직원들의 퇴직금으로 잡고 거기에 각각 30~50%를 가산해서 그 액수에 해당하는 《주부생활》의 주식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주부생활》을 독립시킨다. 그러니까 사원들 모두가 그 당시 자신이 받을 수 있는 퇴직금 액수에 30~50%를 가산한 액수만큼의 주식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대신 당시 적자를 내고 있던 학원사의 주식 일체는 모두 김 선생이 액면 가격대로 샀다. 그리고 살림을 나가는 《주부생활》에는 2000여만 원을 따로 지원해 주었다. 그러니까 김익달은 《주부생활》을 독립시키면서 최근 우리나라 기업 사이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우리사주제'를 이미 실시한 것이다.
 
독립 방식은 다르지만 그 동안 김익달이 매체나 지형을 떼어주어 출판사를 차린 사람은 30여 명이나 된다. 물론, 회사를 하나 떼어 주는 데 있어서도 특별한 조건은 붙이지 않았다. 다만 그 사람의 능력과 회사의 형편이 닿는 대로 일을 처리했다. 보통 사람은 생각하기 힘든 일들이다. 정말 마음을 비우지 않거나, 순수한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회사를 떼어 주거나, 지형을 독립시켜 그들의 꿈을 열어 주는 일에서 기업하는 보람을 더 느꼈다는 김익달은 생전에 늘 이런 생각을 말해 왔었다고 주변 사람
들은 전한다.
 
"저도 어려서 고용살이로 시작했으니까 그분들의 고통을 잘 압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포부가 있는 법이니, 그 뜻있는 분들에게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제 책임이기도 하죠. 그러기에 저는 사업가는 되지 못합니다. 벌기보다 쓸 생각이 먼저 앞서 있으니……."
 
=== 출판 문화계의 씨를 뿌리고 밭을 일구다 ===
우리나라 출판 문화계에는 '학원사 인맥'이라고 칭할 만한 일군의 출판인들이 있다. 말 그대로 김익달이 학원사를 통해 키워 낸 출판인들이 한 집단을 형성할 만큼 많다는 얘기다. 이들 학원사 출신 사람들은 출판을 중심으로 사회 각 분야에 포진되어 오늘날 우리 출판계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더구나 이들 학원사 출신들은 김익달의 이름자를 딴 '''익우회(益友會)'''란 이름의 친목모임을 중심으로 끈끈한 동질성을 확인하고 있다. 이처럼 어느 한 시기에 같은 직장에 몸담고 역경을 공동으로 헤쳐 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 창업주의 유덕을 두고 두고 기린다는 것은, 흥망성쇠가 무성한 출판계의 현실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학원사 출신들 중 출판 일선에서 뛰고 있는 인사들을 살펴보면 대충 이렇다. 먼저 대양출판사와 학원사 초창기 인사들을 보면, 나말선(향문사), 이재근(수학사), 박상련(박우사), 김성재(일지사), 김명엽(여원사), 류국현(교문사), 주채원(정향사), 김인원(양서각), 최태열(육민사), 최덕교(창조사), 손정삼(학창사), 조우제(진학사), 박재서(학원출판사), 고영진(여명사), 이보승(학명사), 진한철(평범사), 김우석(진명출판사), 채희상(지하철문고사), 백동주(금란출판사), 임대희(농원사) 등 20여 명에 이른다. 이 중에는 현역에서 은퇴 또는 2세에게 물려 주었거나 전업한 이도 있지만, 대개는 지금까지 출판계 일선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다.
 
이 밖에 잡지 발행인으로 이규준 씨(전 주부생활 사장)을 비롯, 김재원(여원), 주태길(조원과 원예), 김기제(월간 당구)가 있으며, 인쇄인으로 잉태하(태광문화사), 정태문(홍진문화사), 정해석(인쇄문화사) 씨 등이 '학원맨'으로 칭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한편 역대 편집국장 또는 부장 출신으로 언론ㆍ출판 분야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는 인사들로는 고정기(을류문화사), 최몽섭(계몽사), 강민(금성출판사), 김승환(코리아 이데아 에이전시), 공재화(교학사), 이중(경남일보), 이희춘(금성출판사), 조남웅(정신문화연구원), 이태원(이화여대), 정용재(한국경제신문), 전영호(예음), 한문교(무역협회), 백승철(서울문화사)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 밖에 학원사를 거쳐간 사람들을 일일이 꼽기란 어렵다. 그 중 두드러진 면면을 꼽아보면, 이연기(국민대 인문대학장), 정구호(전 KBS 사장), 백인수(동아일보 편집위원), 김유동(경향신문 교정부장), 전우억(KAL 기획관리실 이사), 박제천(문예진흥원 홍보출판부장) 씨 등 공직자 외에 여류소설가 구혜영, 시인 홍윤기, 정공채, 낭승만, 황명걸, 민 영, 강은교, 문정희, 전민우 씨, 아동문학가 오영민(재미), 윤일숙 씨, 영화평론가 김종원 씨, 번역문학가 윤용성 씨, 서양화가 윤석원, 최충훈 씨, 사진작가 김대벽 씨 등이 있다.
 
그리고 김익달이 창간한 매체 중에 《주부생활》과 《학원》은 현재 민주일보·학원사가 계속 발행해 오고 있으며, 《여원》은 여원사에서, 《진학》은 진학사에서, 그리고 《독서신문》은 독서신문사에서 각각 현재까지 발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