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광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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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전 앞에 펼쳐진 광대한 공간은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명령에 따라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1656년]]에서 [[1667년]]까지 다시 설계하였다. 그리하여 대성전 입면의 중앙 부분과 [[바티칸 궁전]]의 창문에서 교황이 군중에게 보내는 강복 모습을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끔 적당한 크기의 앞마당으로 설계되었다.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광장의 실내 설계에만 수십 년을 보냈다. 이윽고 그는 자신의 유명한 열주랑을 통해 공간에 질서를 주었다. 고전적 건축표현 양식에서 가장 단순한 정렬인 도리스식의 토스카나 주식(柱式)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카를로 마데르노]]의 궁전 같은 입면과 경쟁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공간을 적합하게 하고 외경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도록 그는 전에 없는 거대한 비례를 사용했다.
 
[[파일:Vivianocodazzi stpetersbasilicaSt-peter's-viviano-codazzi-prado-1630.jpg|thumb|right|240px|1630년대의 광장, [[비비아노 코타치]]의 그림.]]
 
광장 부지의 실현성은 이미 존재하는 구조물들 때문에 많은 제약에 걸려 있었다(오른쪽 그림 참조). 바티칸 궁전에 부속 건물들이 자꾸 첨가되면서 밀집하자 어느새 대성당의 전면 오른쪽에 있는 공간에 꽉 들어찼다; 교황의 아파트들을 눈에 띄지 않게 가리도록 구성해야 했다. 중앙에는 [[오벨리스크]]가 세워졌고, 광장 한쪽 구석에는 카를로 마데르노가 만든 화강암 분수<ref>1613년 [[교황 바오로 5세]]의 명령으로 만들어짐.</ref>가 자리 잡고 있었다. 베르니니는 분수가 타원의 초점처럼 보이도록 하였다.<ref>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한 나침도의 바깥 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포장 도로 위를 보면 실제로 6~7m 정도의 검은 대리석 원반이 박혀 있다. 두 개의 원 가운데 하나 위에 서면 네 줄로 된 회랑의 맨 앞줄만 보이고, 나머지 세 줄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 원 위에서 걸음을 옮기면 나머지 세 줄이 갑자기 나타난다. 마치 거대한 기둥 세 줄이 마법에 걸린 것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다. 이 회랑을 설계한 베르니니의 치밀성과 천재성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한 예라 하겠다.(Touring Club Italiano, ''Roma e Dintorni'').</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