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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에 따르면, '''전5식'''(前五識)은 [[심 (마음작용)|심]](尋)과 [[불교 용어 목록/ㅅ#사|사]](伺)의 [[마음작용]]을 본질로 하는 [[감성적 인식]](感性的認識)이며, [[감성적 인식]]을 전통적 용어로 '[[불교 용어 목록/이#인식대상|인식대상]]의 [[자성]](自性: 본질적 성질, 예를 들어, 빨간색의 경우 빨간색 그 자체 또는 노란색의 경우 노란색 그 자체)을 분별(지각)하는 것'이라는 뜻에서 '''자성분별'''(自性分別)이라고 한다.{{sfn|권오민|2003|pp=67-69}} 여기서, [[심 (마음작용)|심]](尋)의 [[마음작용]]은 거친 살펴봄의 [[마음작용]] 즉 개괄적으로 사유하는 [[마음작용]]으로 이 작용을 전통적인 용어로는 [[심구]](尋求: 찾고 탐구함)라고 한다. 그리고 [[불교 용어 목록/ㅅ#사|사]](伺)의 [[마음작용]]은 정밀한 살펴봄의 [[마음작용]] 즉 세밀하게 고찰하는 [[마음작용]]으로 이 작용을 전통적인 용어로는 [[사 (부정심소)|사찰]](伺察: 정밀하게 살펴봄)이라 한다.{{sfn|권오민|2003|pp=69-81}}{{sfn|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K.614, T.1585|pp=[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897&startNum=350 350-351 / 583]}}{{sfn|곽철환|2003|loc="[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2057&categoryId=2886 심사(尋伺)]". 2012년 10월 29일에 확인}}
 
이에 대해, '''의식'''(意識), 즉 '''제6의식'''(第六意識)은 [[혜 (마음작용)반야|혜]](慧: 판단)의 [[마음작용]]을 본질로 하는 [[오성적 인식]](悟性的認識)이며 또한 [[불교 용어 목록/ㅇ#염|염]](念: 기억)의 [[마음작용]]을 본질로 하는 [[기억]](記憶) 또는 [[재인식]](再認識)이다. [[오성적 인식]]을 전통적 용어로 '헤아리고 판단하여[計度] 분별한다'라는 뜻에서 '''계탁분별'''(計度分別)이라 하며, [[불교 용어 목록/구#기억|기억]] 또는 [[재인식]]을 전통적 용어로 '기억[念] 또는 재인식[念]을 바탕으로 분별한다'라는 뜻에서 '''수념분별'''(隨念分別)이라 한다.{{sfn|권오민|2003|pp=67-69}}
 
===무분별·유분별===
 
[[전5식]]은 [[감성적 인식]]일 뿐이기 때문에 완전한 인식이라고 할 수 없으며 또한 [[혜 (마음작용)반야|혜]](慧: 판단)의 작용은 없고 [[심 (마음작용)|심]](尋)과 [[불교 용어 목록/ㅅ#사|사]](伺)의 작용만 있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불확정적인 인식 또는 앎이다. 불확정적인 인식 또는 앎을 전통적인 용어로 '[확정적인] 분별, 식별, 요별 또는 앎이 없다'는 뜻에서 '''무분별'''(無分別)이라 한다. 여기에 [[의식]] 즉 [[제6의식]]의 [[오성적 인식]]과 [[기억]] 또는 [[재인식]]이 더해짐으로 [[마음 (불교)|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비로소 대상에 대해 확정적인 인식 또는 앎을 가지게 된다. 확정적인 인식 또는 앎을 전통적인 용어로 '[확정적인] 분별, 식별, 요별 또는 앎이 있다'는 뜻에서 '''유분별'''(有分別)이라 한다.{{sfn|권오민|2003|pp=67-69}} 한편, [[전5식]]의 본질적 성질로서의 무분별(無分別: 불확정적인 인식)은 [[반야바라밀다]]의 [[무분별지]](無分別智)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므로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설일체유부]]의 논사인 [[제바설마]](提婆設摩)는 《[[아비달마식신족론]]》에서 무분별(無分別) 즉 불확정적인 앎(요별)으로서의 [[전5식]]과 유분별(有分別) 즉 확정적인 앎(요별)으로서의 [[제6의식]]의 차이에 대해, 그리고 정신적 대상(즉 [[법계 (불교)|법경]])을 인식하고 정신적 행위(즉 [[법계 (불교)|법경]]에 대한 작용)를 행하는 [[제6의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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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려'''(審慮)의 한자어 문자 그대로의 뜻은 '살피고 생각하다'로 [[심사숙고]](深思熟考: 깊이 생각하고 깊이 고찰하다)를 뜻한다. 《[[구사론]]》에 따르면 [[심려]](審慮)는 '''결탁'''(決度: 확인 판단)과 함께, [[정견]](正見: 바른 견해)이건 [[악견]](惡見: 잘못된 견해)이건 모든 [[견 (불교)|견]](見: 견해)의 [[마음작용]]의 [[자성 (불교)|본질]][性] 또는 [[공능]](功能)을 이룬다.{{sfn|세친 조, 현장 한역|T.1558|loc=제2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29n1558_p0010c16 T29n1558_p0010c16 - T29n1558_p0010c20]. 견(見)|ps=<br>"何故世間正見唯意識相應。以五識俱生慧不能決度故。審慮為先決度名見。五識俱慧無如是能。以無分別是故非見。准此所餘染無染慧及諸餘法非見應知。"}}{{sfn|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K.955, T.1558|loc=제2권. 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214&startNum=86 86 / 1397]. 견(見)|ps=<br>"어떠한 이유에서 [[세간의 정견]]은 오로지 [[육식|의식]]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 것인가?
[[5식]]과 구생(俱生)하는 [[혜 (마음작용)반야|혜]]는 능히 결탁(決度)하지 않기 때문이다.<sup style="color: blue">78)</sup> 이를테면 먼저 심려(審慮, 심사숙고의 뜻)하고 결탁하는 것을 일컬어 '견'이라고 한다. 그런데 [[5식]]과 구생하는 [[혜 (마음작용)반야|혜]]는 이와 같은 공능이 없으니, [[무분별]][→ 불확정적인 인식을 말함, [[반야바라밀]]의 [[무분별지]]가 아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5식상응의 혜는] 비견(非見)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준하여 그 밖의 염오하거나 염오하지 않은 혜와, 아울러 그 밖의 온갖 법도 비견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sup style="color: blue">79)</sup>
<br><sup style="color: blue">78)</sup> [[자성분별]]만을 본질로 하는 [[전5식]]과 상응하는 [[선혜]](善慧)를 어떻게 [[세간의 정견]]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하는 뜻의 물음. 여기서 '결탁(決度, saṃtīraṇa)'은 확인 판단의 뜻이다.
<br><sup style="color: blue">79)</sup> [[유신견]] 등의 [[5견]] 이외 [[탐|탐]] 등과 상응하는 [[혜 (마음작용)반야|혜]]나 [[육식|의식]]상응의 [[혜 (마음작용)반야|혜]]를 제외한 그 밖의 [[혜 (마음작용)반야|혜]], [[안근|안근]]을 제외한 [[오근과 육근#이근|이근]](耳根) 등의 모든 [[오근과 육근|근]]과 일체의 [[무부무기]]의 [[혜 (마음작용)반야|혜]], [[아라한|무학]]의 [[진지 (불교)|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 그리고 [[혜 (마음작용)반야|혜]] 이외 그 밖의 [[법계소섭법]](法界所攝法)은 [[심려]] [[결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견 (불교)|견]]'이 아니라는 뜻.(『현종론』 권제4, 한글대장경200, p. 83 참조)"}} [[결탁]](決度, {{llang|sa|[[:en:saṃtīraṇa|<span style="color: black">saṃtīraṇa</span>]]}})의 한자어 문자 그대로의 뜻은 '판단하고[決] 헤아린다[度]'인데,<ref>"[http://zonmal.com/hanja_sen.asp?se=%CC%BD%D3%F8 決度]", 《존 한자사전》. 2012년 11월 2일에 확인.</ref> 불교에서는 {{nowrap|'확인 판단'의}} 뜻의 용어로 사용되고 있어, 한자어 문자 그대로의 뜻과는 차이가 있다.
 
《[[구사론]]》에서는 '''심려결탁'''(審慮決度)이 곧 [[견 (불교)|견]](見: 견해)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보다 정확히는, "[[심려]]한 후 [[결탁]]하는 것을 [[견 (불교)|견]](見: 견해)이라 이름한다[審慮為先決度名見]"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6식]](六識) 중 [[전5식]]은 '심려한 후 결탁하는 능력', 즉 [[견 (불교)|견]](見)의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이 능력은 [[6식]] 중에서 오직 [[제6의식]]만이 가지고 있다고 말하여, [[전5식]]과 [[제6의식]]을 분별하고 있다.{{sfn|세친 조, 현장 한역|T.1558|loc=제2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29n1558_p0010c16 T29n1558_p0010c16 - T29n1558_p0010c20]. 견(見)|ps=<br>"何故世間正見唯意識相應。以五識俱生慧不能決度故。審慮為先決度名見。五識俱慧無如是能。以無分別是故非見。准此所餘染無染慧及諸餘法非見應知。"}}{{sfn|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K.955, T.1558|loc=제2권. 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214&startNum=86 86 / 1397]. 견(見)|ps=<br>"어떠한 이유에서 [[세간의 정견]]은 오로지 [[육식|의식]]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 것인가?
[[5식]]과 구생(俱生)하는 [[혜 (마음작용)반야|혜]]는 능히 결탁(決度)하지 않기 때문이다.<sup style="color: blue">78)</sup> 이를테면 먼저 심려(審慮, 심사숙고의 뜻)하고 결탁하는 것을 일컬어 '견'이라고 한다. 그런데 [[5식]]과 구생하는 [[혜 (마음작용)반야|혜]]는 이와 같은 공능이 없으니, [[무분별]][→ 불확정적인 인식을 말함, [[반야바라밀]]의 [[무분별지]]가 아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5식상응의 혜는] 비견(非見)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준하여 그 밖의 염오하거나 염오하지 않은 혜와, 아울러 그 밖의 온갖 법도 비견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sup style="color: blue">79)</sup>
<br><sup style="color: blue">78)</sup> [[자성분별]]만을 본질로 하는 [[전5식]]과 상응하는 [[선혜]](善慧)를 어떻게 [[세간의 정견]]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하는 뜻의 물음. 여기서 '결탁(決度, saṃtīraṇa)'은 확인 판단의 뜻이다.
<br><sup style="color: blue">79)</sup> [[유신견]] 등의 [[5견]] 이외 [[탐|탐]] 등과 상응하는 [[혜 (마음작용)반야|혜]]나 [[육식|의식]]상응의 [[혜 (마음작용)반야|혜]]를 제외한 그 밖의 [[혜 (마음작용)반야|혜]], [[안근|안근]]을 제외한 [[오근과 육근#이근|이근]](耳根) 등의 모든 [[오근과 육근|근]]과 일체의 [[무부무기]]의 [[혜 (마음작용)반야|혜]], [[아라한|무학]]의 [[진지 (불교)|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 그리고 [[혜 (마음작용)반야|혜]] 이외 그 밖의 [[법계소섭법]](法界所攝法)은 [[심려]] [[결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견 (불교)|견]]'이 아니라는 뜻.(『현종론』 권제4, 한글대장경200, p. 83 참조)"}} 정확히 말하자면, [[세친]]은 《[[구사론]]》에서 '제6의식만이 견(見)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은데, 이런 표현은 [[마음 (불교)|마음]]과 [[마음작용]]의 이론, 즉 심{{.cw}}심소(心{{.cw}}心所) 이론에 어긋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세친]]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인용문|何故世間正見唯意識相應。以五識俱生慧不能決度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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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br>
어떠한 이유에서 [[세간정견]](世間正見)은 오로지 [[육식|의식]](意識, 즉 제6의식)과 [[상응]](相應)하는 것이라고 한 것인가?
[[5식]](五識)과 구생(俱生, 함께 일어남)하는 [[혜 (마음작용)반야|혜]](慧)는 능히 [[결탁]](決度)하지 않기 때문이다.
<br><br>
'[[심려]]한 후 [[결탁]]하는 것[審慮為先決度]'을 일컬어 [[견 (불교)|견]](見)이라고 한다. 그런데 [[5식]]과 구생[俱, 함께 일어남]하는 [[혜 (마음작용)반야|혜]](慧)는 이와 같은 공능[能]이 없으니, [[무분별]](無分別)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5식과 상응하는 혜는] [[견 (불교)|견]](見)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구사론》, 제2권.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29n1558_p0010c16 한문본] &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214&startNum{{=}}86 한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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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sup style="color: blue">5)</sup> 다섯 가지 염오견이란 유신견·변집견·사견·견취·계금취로서, 이것이 '견'을 본질로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9 주22) 참조."}}{{sfn|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T.1585|loc=제6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585_p0031c11 T31n1585_p0031c11 - T31n1585_p0032a01]. 견(見)과 혜(慧)의 관계|ps=<br>"云何惡見。於諸諦理顛倒推求度染慧為性。能障善見招苦為業。謂惡見者多受苦故。此見行相差別有五。一薩迦耶見。... 二邊執見。... 三邪見。... 四見取。... 五戒禁取。...."}}{{sfn|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K.614, T.1585|loc=제6권. p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897&startNum=308 308-310 / 583]. 견(見)과 혜(慧)의 관계|ps=<br>"무엇이 ‘악견(惡見)심소’<sup style="color: blue">138)</sup>인가? 모든 진리와 논리에 대해서 뒤바뀌게 추측하고 헤아리는 잡염의 혜를 체성으로 삼는다. 능히 바른 견해를 장애하여 고통을 초래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악견은 고통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이 악견의 행상(行相)은 구별하면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살가야견(薩迦耶見) ... 둘째는 변견(邊見) ... 셋째는 사견(邪見) ... 넷째는 견취견(見取見) ... 다섯째는 계금취견(戒禁取見)[... 이다]."}}{{sfn|황욱|1999|p=61. 견(見)과 혜(慧)의 관계|ps=<br>"‘見’은 모든 진리와 논리에 대하여 그릇되게 추측하고 헤아리는 雜染의 慧로써 그 體를 삼으며, 능히 바른 견해를 장애하여 고통을 초래하는 것으로써 業을 삼는다."}} [[추탁]]의 일반 사전적인 의미는 '추측하다, 미루어 짐작하다 헤아리다'인데,<ref>"[http://cndic.naver.com/zh/entry?entryID=c_3cf5b8efaf87 推度]", 《네이버 중국어사전》. 2012년 11월 2일에 확인.</ref> 불교 용어로서의 [[추탁]]의 의미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한편,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에서는 모두 [[견 (불교)|견]](見: 견해)이 [[혜 (마음작용)반야|혜]](慧: 판단, 지혜)의 특수한 경우, 즉 따로 명칭을 붙일만한 일부인 것으로 본다. 즉, [[혜 (마음작용)반야|혜]](慧)가 더 광범위한 개념인 것으로 본다.{{sfn|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T.1585|loc=제6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585_p0031c11 T31n1585_p0031c11 - T31n1585_p0032a01]. 견(見)과 혜(慧)의 관계|ps=<br>"云何惡見。於諸諦理顛倒推求度染慧為性。能障善見招苦為業。謂惡見者多受苦故。此見行相差別有五。一薩迦耶見。... 二邊執見。... 三邪見。... 四見取。... 五戒禁取。...."}}{{sfn|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K.614, T.1585|loc=제6권. p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897&startNum=308 308-310 / 583]. 견(見)과 혜(慧)의 관계|ps=<br>"무엇이 ‘악견(惡見)심소’<sup style="color: blue">138)</sup>인가? 모든 진리와 논리에 대해서 뒤바뀌게 추측하고 헤아리는 잡염의 혜를 체성으로 삼는다. 능히 바른 견해를 장애하여 고통을 초래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악견은 고통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이 악견의 행상(行相)은 구별하면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살가야견(薩迦耶見) ... 둘째는 변견(邊見) ... 셋째는 사견(邪見) ... 넷째는 견취견(見取見) ... 다섯째는 계금취견(戒禁取見)[... 이다]."}}{{sfn|황욱|1999|p=61. 견(見)과 혜(慧)의 관계|ps=<br>"‘見’은 모든 진리와 논리에 대하여 그릇되게 추측하고 헤아리는 雜染의 慧로써 그 體를 삼으며, 능히 바른 견해를 장애하여 고통을 초래하는 것으로써 業을 삼는다."}}{{sfn|권오민|2003|pp=192-197. 견(見)과 혜(慧)의 관계|ps="6수면설은 다시 그 중의 '견'을 유신견有身見·변집견邊執見·사견邪見·계금취戒禁取·견취見取의 다섯 가지로 분별함으로써 10수면으로 발전한다. '견見(drsti)'이란 의식의 모든 순간에 나타나는 보편적 작용(즉 대지법) 중 '혜'로 분류되는 판단작용을 말하지만, 여기서의 '견'은 물론 그릇된 견해 즉 염오혜染汚慧를 말한다. 즉 그릇된 견해 역시 확인 판단된 것이기 때문이다."}}
 
== 6식과 8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