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4.50.46.190(토론)의 16369460판 편집을 되돌림
2016년 4월 22일 (금) 19:49 판으로 되돌림
46번째 줄: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조인원의 선도로 시위가 시작되자 유관순은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유관순의 부모 유중권과 이소제는 시위 현장에서 [[조선총독부]] 헌병들이 군중을 향해 쏜 총에 맞아 살해되었고, 속장 조인원 등도 총격으로 부상당했다. 아우내 만세시위 주동자로 일제 헌병에 붙잡힌 유관순은 미성년자인 점을 감안하여 범죄를 시인하고 수사에 협조하면 선처하겠다는 제안을 거절하였고, 이후 고문을 받았으나 협력자와 시위 가담자를 발설하지 않았다.
 
=== 투옥과 최후 ===
유관순은 천안경찰서 일본헌병대에 투옥되었다가 곧 공주경찰서 감옥으로 이감되었고, 공주지방법원에서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의 1심재판에서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 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유관순은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같은 해 [[6월 30일]] [[조선총독부 재판소|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후 상고를 포기하였다. 유관순은 경성복심법원 재판 당시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항의하면서, [[조선총독부]] 법률은 부당한 법이며 그에 따라 일본 법관에 의해 재판을 받는 것은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유관순 열사는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76번째 줄:
이 자료에는 아우네 만세 운동 당일의 희생자도 기재되어 있는데, 유 열사 부친인 유중권 열사의 기록이 가장 먼저 나온다. 순국 경위는 "3·1운동 독립만세로 인하여 총살당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시는 기미년(己未年·1919년) 3월 1일, 장소는 천안군 병천면 병천리이다. 이는 1987년에 작성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한다. 보훈처에 따르면 공훈록은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의 만세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 헌병들은 시위군중을 추격하며 발포하고 칼로 찔렀다고 전하고 있다.
 
또, 이 자료에는 유중권 열사의 바로 옆에 성명이 "李氏"라고 표기된 여성이 등장한다. 주소·순국장소·순국상황 난에 유중권 열사와 같다는 기호(〃)로 표기돼 있어 유관순 열사의 어머니로 알려진 이소제 열사로 추정되고 있는데, 유중권 열사와 이씨를 포함해 20명이 같은 장소·날짜·상황에서 순국했다는 자료의 내용은 1987년에 작성된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 열사와 어머니 "이씨(李氏)"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했다는 기록과 같다. 일단, 국가기록원은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의 이씨를 미확인자로 분류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01&aid=0006605921&isYeonhapFlash=Y "유관순 옥중서 打殺돼"..3·1운동 순국상황 드러나] 연합뉴스, 2013.11.19.</ref>(물론 링크들은 모두모두모두모두모두 거.짓.말이다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