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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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은 [[남강 (경상도)|남강]]을 끼고, 외성의 둘레를 4km로 쌓고, 내성의 둘레는 1.7km에 이른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소재해 있다.
 
성곽의 둘레는 1,760m이고 성 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서장대, [[창렬사 (진주시)|창렬사창열사]], [[호국사 (진주시)|호국사]],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있고, [[1984년]]에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국립진주박물관]]이 개장을 하였다.
 
== 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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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은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역사의 보고이며, 아름다운 남강과 절벽에 지어진 진주성과의 잘 조화된 자연미를 느낄 수 있는 건축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진주성 내에는 정문인 촉석문과 후문인 공북문, 그리고 망루인 촉석루와 서장대, 북장대를 비롯하여 사찰로는 호국사가 있고, 사당으로는 하공진 장군을 모신 경절사, 충절의 여인 논개를 모신 의기사, 임진왜란 때 전몰한 순국영령들을 모신 창렬사가창열사가 있으며, 임진왜란 전문박물관으로 명성이 높은 국립진주박물관과 문익점의 장인이자 베틀을 발명하여 의생활을 혁명을 일으킨 정천익 선생을 모신 청계서원 등 많은 주요 시설물들이 있다.<ref>{{웹 인용
|url = http://tour.jinju.go.kr/01/01_01.php?pT_idx=9
|제목 = 진주성 유적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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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hangRyeol shrine.jpg|thumb|250px|임진왜란 순국영령을 모신 창렬사창열사]]
=== 창렬사창열사 ===
{{참고|창렬사 (진주시창열사)}}
창렬사는창열사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무공 김시민 장군 등 39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1607년]] 선조 40년 사액을 받았으며, 고종 조의 [[서원철폐령]]에도 제외된 47개소의 서원 중 하나로 당시 김시민 장군을 모셨던 충민사가 철폐되고 이곳으로 통합되었다. 진주성 정문인 촉석문의 반대쪽에 서장대 아래의 호국사 옆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경상남도 시도지정유형문화재 제2호인 촉석정충단비와 함께 순국영령을 기리는 건물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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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국사 ===
{{참고|호국사 (진주시)}}
전통 사찰 제70호로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원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였다. 고려 말에 왜구를 막기 위한 승병을 기르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때는 승군(僧軍)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때 호국사(護國寺)란 이름으로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호국사와 창렬사는창열사는 바로 붙어 있는 건물이며, 윗쪽으로 서장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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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center|4호 || [[북장대 (진주성)|북장대]] || 北將臺 || [[1983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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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center|5호 || [[창렬사 (진주시)|창렬사창열사]] || 彰烈祠 || [[1983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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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center|6호 || [[서장대]] || 西將臺 || [[1983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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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orea-Jinju-Jinju.Fortress-01.jpg|정문인 촉석문
파일:Nongae Shrine.jpg|논개사당 의기사
파일:ChangRyeol shrine.jpg|순국영령을 모신 창렬사창열사
파일:Jinju castle-outside.jpg|외부에서 본 진주성곽
파일:Seojangdae2-Jinju Castle.jpg|절벽위의 서장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