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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후==
1945년 8월 12일 싱크는 101공수 사단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12월, 싱크는 미국으로 돌아왔으며 그해 말에 미국 육군 사관학교의 분견대의 지휘를 맡았다. 싱크는 1948년 8월 워싱턴D.C의 레즐리 J. 맥네어 기지의 미국 전쟁 대학에 들어갔으며 1949년 6월 졸업하였다. 이후 싱크는 류큐 사령부로 전출되었으며 1949년 10월에는 참모장이 되었다. 1951년 1월, 싱크는 7 보병 사단의 부사령관이 되어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ref>한국전쟁 당시인 51년 4월 중국군의 춘계 공세가 개시되자 미 제7사단 부사단장인 로버트 싱크는 한국계 미군인 김영옥 대위에게 미군 및 한국군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인제군 계운동 계곡의 다리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김영옥 대위는 전차 소대를 다리 남쪽에 세워 놓고 후퇴하던 중대급 한국군 보병들을 멈춰세운 후, 그들과 함께 임시 방어선을 구축하여 후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지원했다</ref>.
 
미국으로 돌아온 싱크는 1951년 12월, 켄터키주 캠벨 기지에 있는 11 공수 사단의 부사령관이 되었다. 1953년 2월에는 캘리포니아주 로버츠 기지의 7기갑사단의 사령관이 되으며 1953년 11월에는 워싱턴주 루이스 기지의 44보병 사단의 사령관이 되었다. 1954년 10월, 싱크는 노스 캐롤라이나주 브래그 기지의 연합 공수 부대에 이름을 올렸다. 1955년 초, 싱크는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로 전출되었으며 1955년 4월에는 브라질-미국 군사 협의회의 의장직과 브라질의 군사 원조단의 육군 위원장직을 겸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