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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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군대를 조선에 들여보냈고, 이때 청나라 상인들이 [[제물포]]에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ref>박상순, 〈[http://www.riss.kr/link?id=T8425396 在韓中國人의 法的地位에 관한 硏究 : 臺灣系中國人을 中心으로]〉 [[인천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학위논문(2001) v쪽. “재한중국인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청국인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유입된 것은 1882년 임오군란이후의 일이다.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당시 종주국을 자처하던 청국이 일본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청국군인을 파견하였다. 이때 청국군인을 따라온 청국상인이 국내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재한중국인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ref> 1884년에는 중국인의 거주를 위한 땅을 제공한다는 협약이 맺어졌다. 현재 북성동과 선린동 일대의 만5천여 평방미터가 이때 중국인에게 제공되었다. 한때 인천에 거주하는 중국인이 1만명에 달하였다. 이주초기에 이들은 이발사, 요리사, 재단사로 일하였으나, 근래에는 여행가이드가 가장 많고, 한약방, 무역업, 잡화상, 식재료상을 하고 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중화민국]] 정부는 전쟁 발발 초기부터 국공내전에서의 패배를 한국전쟁 파병으로 만회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 계획은 중공군 참전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좌절됐지만 결국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게 되면서 심리전 요원을 파견하는 형태로 전쟁에 개입했다. 대부분이 한국에 거주하던 화교학교 교원과 학생들 심리전 요원들은 중공군을 상대로 투항을 권유하는 일을 맡았다.<ref>{{뉴스 인용 |url =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3&artid=201006161438331 | 제목 = <nowiki>[2010[2010 연중기획]</nowiki>연중기획] ‘전쟁의 진실’ 성찰의 눈으로 보다 | 날짜 = 2010-606-22 | 출판사 = 경향신문사 |뉴스 = 주간경향 | 인용문 = 대만 국민당 정부는 전쟁 발발 초기부터 국공내전에서의 패배를 파병을 통해 만회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 계획은 중국군 참전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좌절됐지만 결국 중국군이 참전하게 되면서 심리전 요원을 파견하는 형태로 전쟁에 개입했다. 심리전 요원들은 중국군을 상대로 투항을 권유하는 일을 맡았다. 왕옌메이 교수는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한국에 거주하던 화교학교 교원과 학생들이라고 말한다. }}</ref>
 
== 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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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기준으로 인천의 차이나타운에는 150~200여 가구에 695명의 화교가, 인천에는 약 3천명의 화교가 거주하고 있다.<ref>{{뉴스 인용 |저자= 강경표 |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8/04/2011080400138.html |제목 = 중국피 6.25% 한국피 93.75%… 이 아이는 중국인입니까 한국인입니까| 출판사 = [[조선일보]] |인용문=한때 1만명에 이른 적도 있지만, 현재 차이나타운 화교 인구는 150~200여 가구에 695명, 인천 전역에는 약 3000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ref>
 
== 국적 문제 ==
=== [[대한민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