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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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3월 4일]], [[에이브러햄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취임 연설에서, 링컨 대통령은 헌법은 이전 연방의 법령보다 더 완벽한 연합이며, 의무를 부과하는 계약이라는 점에서 영구적인 연합이기도 하며, 모든 부분은 "법적으로 자유롭다."라고 하였다. 그는 남부를 공격할 의도도 없으며, 존재하는 노예제를 끝낼 의도 역시 없지만, 연방정부 재산의 소유를 지키기 위해 힘을 쓸 것이라 진술하였다. 그의 연설은 연합의 결속 재회복을 위한 탄언과 함께 끝맺었다. 남부는 대통령에게 대표를 보내었고 연방 자산을 지불하고 미국과 평화조약을 시작하였다. 링컨 대통령은 연합 의원과의 협상은 무조건 거절하였는데, 이는 남부연합 정부는 합법적인 정부가 아니며 이들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이들을 완전히 독립된 정부로 인정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의 국무장관 [[윌리엄 슈워드]]는 비공식적이고 간접적인 협상을 유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찰스턴의 [[섬터 요새]], 피켄스 요새, 그리고 테일러 요새는 연방에 남아있는 요새였고, 링컨 대통령은 [[섬터 요새]]를 사수하기로 결정하였다.
 
[[파일:ConfederateBattieries2Confederate Batteries 2.jpg|right|thumb|남부 연합군에 의한 섬터 요새의 포격]]
[[4월 12일]] 새벽 4시 30분 남부연합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지휘 하에, 연합 정부 [[피에르 보우리가드|보우리가드]]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대포로 섬터 요새를 포격하여, 요새의 항복을 강요하였다. 북부인들은 링컨 대통령의 지시 하에 모든 주들이 요새를 탈환하고 유니언을 수호하고자 저항하였다. 대응군의 규모가 너무 적어서, 링컨 대통령은 90일간 75,000명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 전 몇달간, 북부 의원들은 은밀하게 주 방위군을 준비하였고, 다음 날 병력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리버티의 리버티 아스날과 미주리는 섬터 요새가 함락된 8일 이후 포위되었다. 계속해서 남부연합과의 협상을 반대한 남부 상단의 네 주([[테네시 주|테네시]], [[아칸소 주|아칸소]],[[노스캐롤라이나 주|노스캐롤라이나]], 그리고 [[버지니아 주|버지니아]])는 이제 이웃에 군사를 보내는 것을 거절하였고, 계승을 주장하였으며, 남부연합에 참여하였다. 버지니아에 보답하기 위하여, 남부연합의 중심은 [[리치먼드 (버지니아 주)|리치먼드]]로 옮겨졌다. 그 도시는 남부연합의 상징이었다. 리치먼드는 복잡한 남부연합 보급선의 끝에 위치한 매우 공격받기 쉬운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리치먼드는 중무장 상태였지만, 셔먼의 애틀란타 포위에 의해 리치먼드의 보급로는 줄어들었고, [[율리시스 S. 그랜트|그랜트]] 장군이 남부 자본의 공급주였던 피터스버그와 철로를 포위할 때 거의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