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성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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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삼로군 중 [[명나라]] 장수 [[동일원]]이 인솔하는 중로군 4만 명의 조·명 연합군이 시마즈군이 주둔하는 [[사천시|사천]]으로 남진해 들어갔다. 사천은 일본군의 근원지인 [[부산]]과 일본군 왼쪽 끝의 [[순천왜성]]과 [[남해왜성]]의 중간에 있기 때문에, 이곳을 함락시키면 서쪽으로 있는 일본군과의 연락이 분단될 위험이 있었다.
 
당시 사천일대의 일본군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주축으로 한 시마즈 가문의 5개 부대가 다소 느슨한 지휘체계로 결합해 있었다. [[1597년]] 시마즈 요시히로는 [[모리 가쓰노부]]가 축성한 [[사천 선진리왜성]]에 주둔하며 사천에서 진주에 이르는 요해(要害)에 진영을 설치하는 한편, [[진주성]]에 미하라 시게다네(三原重鍾)를 주둔시키고 [[망진왜성]]에는 중로군이 남강을 건너 남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데라야마 히사가네]](寺山久兼)로 하여금 수비를 담당시켰다. 또한, 영춘과 사천에 성을 축조·보수하여 [[영춘왜성]]과 [[사천구성]]<ref>사서에는 사천읍성을 사천구성이라 서술하고 있으며 사천왜성(선진리왜성)을 사천신성으로 서술하고 있다.</ref>에는 [[가와카미 히사토모]](上久智)와 [[가와카미 다다노리|가와카미 다다자네]](川上忠)로 하여금 각각 수비하게 하여 [[진주시|진주]] [[남강 (경상도)|남강]]을 최전 방위선으로 삼고 또 망진왜성·영춘왜성·사천구성의 3성을 사천 선진리왜성의 전진 방어진지로 삼고 있었다. 시마즈군의 병력은 시마즈 요시히로와 요시히로의 아들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가 인솔하는 7천 명뿐이었다.
 
[[소 요시토시|소]](宗)군이나 [[다치바나 무네시게|타치바나]](立花)군이 원군을 신청하였지만, 요시히로는 이 제의를 거절해,<ref>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은 병력으로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생각에, 다른 집안의 군대의 인원이 섞이는 것으로 제휴가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가능성이 있다.</ref> 시마즈 가의 군세만으로 조·명의 대군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