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성: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22번째 줄:
 
== 생애 ==
[[숭정제]]가 즉위하던 시기 명은 말기 증상을 노정했다. 숭정제가 즉위하고서 기근이 들고 도처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데다가 후금군도 나날이 격렬하게 침공했다. 후금군의 주병력이었던 만주족은 국호를 [[후금]]에서 [[청나라|청]]으로 개칭한 후 청군(후금군의 후신) 명장 [[원숭환]]이 침공하는 후금군을청군을방어해방어하여 왔으나 후금의 [[홍타이지]]가 전개한 책략에 빠진 숭정제가 무고한 원숭환을 의심하여 죄를 물어 북경 서시(西市) 거리에서 온몸을 칼로 잘라서 죽인 탓에 침공하는 후금군을청군을 방어할 힘이 사라진 때 이미 백성을 규합하고 틈왕(闖王)이라 자칭한 뒤 전사한 [[고영상]]을 계승한 이자성이 농민군을 지도하여 [[시안 시|서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이라 칭하였으며, 그 농민군 세력이 북경에 육박했다육박하였다.
 
숭정 17년인 [[1644년]] [[4월 25일]]([[음력 3월 19일]]), 이자성이 농민군을 지도하여 북경을 점령하자 명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신무문으로 나와 매산(煤山)에서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33세였다. 숭정제가 죽으면서 명은 멸망했다.
 
[[1644년]] [[5월 27일]] 후금의[[청나라|청]]의 [[도르곤]]은 명의 숭정제가 죽자 투항한 명의 장수 [[오삼계]]와 함께 [[산하이관|산해관]]을 넘어 이자성을 공격하여 격파하고서 명의 도읍인 북경에 진입해 자신들이 명의 정통성을 승계한 왕조라고 선포하였다. 동년, 만주족은 국호를 [[후금]]에서 [[청나라|청]]으로 개칭했다.
 
북경에서 현재 [[산시 성 (섬서성)|섬서]] 상락시인 상주로 철수한 이자성이 지도하는 농민군이 계속 패퇴하자 많은 명의 유신(遺臣)이 [[난징|남경]]에서 세운 [[남명]]이나 청에 투항하여 이자성이 지도하는 농민군 세력은 급속히 약화했다. [[1645년]] 이자성이 지도하는 농민군은 청에 동관(潼關)마저 빼앗기자 [[샹양 시|양양]]을 거쳐 [[후베이 성|호북성]]으로 이동하였다. 거기서 남명의 좌양옥(左良玉)과 연합하여 청군에 대항하여 형세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좌양옥이 도중에 병에 걸려 죽어서 그 천재일우의 기회는 안개가 걷히듯 흩어져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