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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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교 앞에 있는 홍살문(紅살門, 紅箭門)은 붉은 물감을 칠한 나무 문으로,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는데, 그 중앙에는 삼태극 문양이 있다. 능·원·묘·궁전 앞에 세웠는데, 해당 장소의 신성함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왕릉 입구뿐만 아니라 왕릉군의 입구에도 홍살문을 세워놓는다. [[홍살문]] 바로 옆에는 배위(拜位)가 있는데, 한평 정도 되는 공간에 돌을 깔아 놓았다. 여기서 왕이 절을 하는데, 판위 또는 어배석, 망릉위라고도 한다.
<ref>{{서적 인용
|저자=이병유
|기타=
|제목=王에게 가다|날짜=2010
|출판사=지오마케팅/문화재청
|id=ISBN 978-89-92158-08-4|쪽=2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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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침 공간 ====
[[File파일:Korean royal tomb structure.svg|thumb|350px|1. 곡장 2. 석호 3. 석양 4. 망주석 5. 봉분 6. 난간석 7. 혼유석 8. 문인석 9. 장명등 10. 석마 11. 무인석 12. 예감 13. 비각 14. 정자각 15. 참도 16. 수라간 17. 수복방 18. 배위 19. 홍살문]]
성역공간이라고도 하며, 경사면이 완만한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언덕은 고려왕릉에서 유래되었다. 장대석(長臺石)에 의해 능침 공간은 하계, 중계, 상계로 나뉘는데, 하계에는 [[봉분]]을 지키는 무인석과 석마 한 쌍이 있고, 중계에는 능 주인의 명을 받드는 문인석과 석마 한 쌍, 장명등(長明燈)이 있다. 상계에는 봉분(封墳)을 중심으로 혼이 쉬는 공간인 혼유석(魂遊石)이 봉분 앞에 있고, 봉분의 양 쪽에는 [[망두석|망주석]](望柱石)이 하나씩 있다. 망주석에 대해서는 혼령이 [[봉분]]을 찾는 표지설과 음양의 조화설, 풍수적 기능설 등의 주장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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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태종|이방원]](태종)에 의한 [[정릉]] 훼손 사례 =====
[[조선 태종|이방원]](태종)은 대군 시절 당시, 계모 [[신덕왕후]]가 부왕 [[조선 태조|태조]]를 꼬드겨 방원을 제치고, [[신덕왕후]]의 어린 아들인 [[의안대군 (이방석)|방석]]을 세자로 내세운 것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 1405년 [[정릉 (신덕왕후)|정릉]]이 도성 안에 있어 능역이 광대하다는 논란을 내세워 100보(180m) 밖까지는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고 한다. 그 뒤 권세가들이 정릉 주변의 땅을 차지했는데, [[하륜]]은 사위들까지 동원했다.<ref>[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ca_10604007_001 태종 6년(1406년 명 영락 4년) 4월 7일 1번째기사 [[정릉]]의 영역을 정하다]</ref> 왕위에서 물러난 [[조선 태조|태상왕]](태조)은 주변에 권세가들의 집이 들어서가는 [[정릉]]에서 남몰래 울었다고 한다.<ref>[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ca_10605002_002 태종 11권, 6년(1406년 명 영락 4년) 5월 2일 2번째기사 태상왕이 흥천사의 계성전에 전을 드리다]</ref> [[조선 태조|태조]]가 승하한 뒤에는 태종은 [[신덕왕후 강씨]]를 왕후에서 첩으로 격하시켰다. 이에 따라 정릉도 능에서 묘로 강등된 뒤 도성 밖 양주(현 [[성북구]])로 이장되었으며, 석물들은 [[광통교]] 공사에 쓰이게 되었다.
<ref>{{서적 인용
|저자=박시백
|기타=
|제목=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날짜=2005
|출판사=휴머니스트
|id=ISBN 978-89-5862-038-9|쪽=25 ~ 26}}</ref> 그 뒤 [[조선 현종|현종]] 때 송시열의 청으로 신덕왕후는 다시 왕후로 추숭하였고, 이에 따라 정릉도 다시 추봉되어 석물들이 설치되었는데, 이러한 까닭에 [[정릉 (신덕왕후)|정릉]]에는 조선 초기의 사각장명등과 조선 후기의 석물들이 공존하게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ra_200001&tabid=k 현종대왕행장]</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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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정부에 의한 훼손 사례 ====
1970년대 [[박정희 정부]] 때 ‘[[세종대왕]] 성역화 사업’이란 이름으로 [[영녕릉|영릉]]의 기존 능제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있다. 본래 2개의 길로 되어 있던 영릉의 참도가 1개 더 추가되었는데, 조선왕릉에서 3개로 이루어진 참도는 황제릉의 형식으로 조성된 [[홍유릉]]에만 존재했던 양식이었다. 또한 기존 참도에 사용하던 박석 대신 화강암을 깔았고, 정자각의 동계에는 임금이 올라가는 어계와 혼이 올라가는 신계 이외에 계단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소나무]] 숲을 베어내고 [[잔디]]를 심어 기존 조선왕릉들과는 달리 주변에 울창한 숲이 없다는 점 등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박정희 정부]]가 조선왕릉이 가진 자연조화적인 가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있다.
<ref>{{서적 인용
|저자=이정근
|기타=
|제목=신들의 정원 조선왕릉|날짜=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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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년도
! 봉원년도
! 위치
|-
|align=center|[[순창원]] || 順昌園 || [[순회세자]], [[공회빈 윤씨]] || [[1563년]] || [[1870년]] || 경기 고양
381번째 줄:
|align=center|[[수길원]] || 綏吉園 || [[정빈 이씨]] || [[1721년]] || [[1778년]] || 경기 파주
|-
|align=center|[[수경원]] || 綏慶園 || [[영빈 이씨]] || [[1764년]] || [[1899년]] || 경기 고양
|-
|align=center|[[의령원]] || 懿寧園 || [[의소세손]] || [[1752년]] || [[1870년]] || 경기 고양
416번째 줄:
* [[홍유릉]] (경기도 [[남양주]])
* [[광릉]] (경기도 남양주)
{{Col-3}}
* [[국조오례의]]
* [[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