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이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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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이씨'''(廣州 李氏)는 [[경기도]] [[광주시 (경기도)|광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 시조역사 ==
광주 이씨(廣州 李氏) 시조는 [[신라]] [[내물왕]] 시절에 내사령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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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이씨의 중흥의 조(祖)는 고려 말의 학자 둔촌(遁村) [[이집]](李集)이다.
 
광주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88명, 상신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을 배출하였다.
== 유래 ==
 
== 유래기원 ==
[[경기도 광주시|광주]] [[이씨]] 족보에 의하면<ref>[http://www.gwanglee.or.kr/history02 광주이씨유래], 《광주이씨대종회》, 2011년 4월 22일 확인.</ref>
{{인용문|광주 이씨 조상들은 신라 [[칠원면|칠원]](현재의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일종의 부족 사회를 이루고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하여 내려온 칠원성은 신라의 모든 성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뒤에도 [[마의태자]]만을 왕으로 섬길 뿐 [[왕건]]에게는 굽힐 수 없다하여 끝까지 항거하였다.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칠원성을 함락시키고 이씨성을 가진 일족들을 모두 체포하여 회안(현재의 경기도 광주 북부를 일컬음)지방 관헌들에게 노비로 삼도록 하였다.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광주 지방의 노비 중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재주가 있고 덕망이 높다고 알려지면서, 이를 동정한 관리들이 그들의 신분을 높여주었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서는 더러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 이 중에 이당(李唐)이 고을 원님의 아전을 살고 있었는데, 그 원님의 딸과 혼인을 맺어 그들 사이에서 대대로 재주가 있고 덕망이 높은 자손들이 번창하였다. 이당(李唐)의 아들 다섯이 다같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다섯 아들 중 둘째가 유명한 둔촌(遁村) 이집 선생으로 고려말 정몽주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집이 있던 고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 서울의 둔촌동이 되었다. 둔촌동에는 지금까지도 그가 살던 유적지와 그와 관련된 전설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조상 중에서 오늘날 기록이 확실히 남아있는 사람이 한음의 8대조 되는 둔촌(遁村) 이집 선생이므로 대부분의 광주이씨 들은 이당(李唐)을 시조로 하고 둔촌을 광주 이씨의 제1대로 기록하고 있다. 한음 [[이덕형]]을 비롯하여 광주 이씨의 주류를 이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후손들이다. 처음에는 본관을 회안으로 칭관하다가, [[940년]] 지명이 광주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광주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88명, 상신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을 배출하였다.
 
== 분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