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선 (189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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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 [[1958년]]까지 서울[[로터리클럽]] 회장에 취임하여 [[로터리 클럽|한국 로터리]] 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 공로를 남겼다. 그 뒤 서울 YMCA 청년회 총무를 거쳐 [[1958년]] ~ [[1959년]]까지 YMCA 청년회 총무를 역임하였다. 그 뒤 YMCA 총무에 재선되었다가 [[1960년]] 사퇴했다.<ref>자화상을 그리듯이 1 전택부 지음 | 범우사 | 1997) 224</ref> YMCA 기독교 청년회 총무가 되어서는 건물부지 마련을 위해 기탁금을 기부하여 종로 3가의 건물을 짓도록 도와주었다.
[[1958년]] [[3월 25일]]에는 [[농촌은행설립위원회]] 운영위원, [[4월 1일]]에는 [[농업은행]](農業銀行中央會, 농업협동조합 중앙회의 전신) 민간부문 운영위원에 위촉되어 농촌 영농자금 지불 조건을 완화시키고, 영농자금 공급의 각종 불합리성을 시정케 하였다. [[1959년]] [[10월]]에는 YMCA 재단 회장이 되었다.
 
[[1960년]] 이후 보이스카우트활동도 참여하여 한국 청소년의 지도육성에 헌신하였으며, [[4월 19일]] [[4.19 혁명]] 때는 학생들에 대한 정부의 관대한 처분을 호소하기도 했다. 1960년대 이후 4H클럽중앙위원회 회장, [[대한적십자사]] 비서실장을 역임하였으며, 학교법인 [[송도고등학교|송도학원]](松都學園)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