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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고등학교|성주농업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입학해 1960년에 졸업하였다. 1964년부터 2년간 AID장학금을 받아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해인 1959년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고, 1962년 3월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시작으로 경제관료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주로 경제기획원에 근무하면서 1967년 물가정책과장, 1969년 물가정책국장, 1973년 경제기획국장, 1974년 차관보, 1977년 차관(1980년에 다시 차관)을 역임하는 등 중요한 직위를 두루 거쳤다. 그러면서 물가정책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종래의 개별품목을 대상으로 가격을 안정시키는 물가정책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종합적인 물가수급대책으로 물가안정을 꾀하는 합리적인 물가정책을 도입하였다. 이 밖에도 1973년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부단장, 청와대 경제제1수석비서관, 1979년 12월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 1980년 5월 경제기획원 차관을 거쳐 1980년 ∼ 1982년 상공부장관, 1982년 [[KDI|한국개발연구원]] 자문위원을 역임하였다. 상공부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을 마무리하고, 수출 200억달러의 실적을 올리기도 하였다.
 
1983년 잠시 미국 [[하와이 대학교]] 동서문화센터에 가 있다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에 발탁되어 45세의 나이로 최연소 부총리가 됐다. 취임한 지 3개월 만인 1983년 10월, 당시의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하여 17박 18일간의 [[서남아시아]]·[[태평양]] 6개국 순방길에 나섰다가 10월 9일 [[미얀마]]의 수도 [[양곤|양곤시]]내 아웅산묘소에서 북한의 공작원이 장치한 폭탄이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폭발]]하여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