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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최초의 노비 해방자는 개화파 정치인 [[윤치호]]였다.{{출처|날짜=2014-03-24}} [[1895년]] [[2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윤치호]]는 자기 집의 노비문서를 불에 소각하고, 노비들에게 재산을 주어 독립시켰다. [[1895년]] [[12월]] [[서재필]] 귀국 이후 [[윤치호]]와 [[서재필]]은 노비를 해방시킬 방안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적당한 시기가 오면 이를 공론화시키기로 작정하고 [[1897년]] 이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상정한다.
====토론회====
[[1897년]] [[11월 1일]]에 개최 한 토론회에서는 주제를 노비 제로 선정 하여 그 부당함에 대한 열띤 논의를 개진케 하였다. 이 때 주제가 "동포 형제 간에 남녀를 팔고 사고 하는 것이 의리상에 대단히 불가하다는 문제" 였다.<ref name="samgui330">삼귀문화사, 《한국근현대사논문선집 개화(10)》 (삼귀문화사, 2002) 58페이지</ref> 이 토론회 에서는 일반 회중이 토론에 자유로이
====기독교계의 노비해방====
개화기에 기독교인들이 노비해방을 하는 일이 있었다. 몽양 [[여운형]]은 [[기독교인]]이 된 후에 노비문서를 불태워버림으로써 집에서 부리던 노비들을 해방하였다. 기독교신문인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에 양반 부인이 노비를 부리는 것이 하느님께 [[죄]]가 된다는 신념으로써 여성노비를 해방하였으며, 자신의 수양딸로 [[입양]]하였다는 이야기가 실렸다.<ref>《기독교 사회주의 산책》/이덕주 글/홍성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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