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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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이 등극한 후 이자겸이 자신의 외조부라는 이유로 특별한 예우를 하고자 했으며 1122년 음력 10월에는 한양공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이자겸은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1124년 음력 7월 조선국공으로 높여 책봉하도록 만들었다. 이자겸은 자신의 위세가 드높아지고 인종이 어린 것을 이용하여 섭정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임의로 국사를 자신의 집에서 처리할 때가 많았는데, 사사로운 청탁이 들어오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안인, 최거린 등의 비판을 받았다. 이들이 사라진 뒤에도 신하들은 이를 못마땅히 여겼다.
 
[[한안인]]을 제거한 이자겸은 정치권력을 독점하였다.<ref name="dangtack136"/> 또한 왕위를 노리는 왕숙들까지 제거했다. 그러나 역모에 가담하지 않은 반대파들도 숙청하여 조정을 장악한다. 이자겸은 권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차례로 왕과 결혼시켜 왕비로 삼게 하였다.<ref name="pare1996245"/> 당시의 관리들에게 정치권력이 이자금이자겸 1인에게 집중되는 현상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ref name="dangtack136"/> [[유학자]]들은 이를 비난하였지만 [[고려]]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진 [[근친혼]]이 있었고, [[유교]]세력의 비난에 그는 근친혼의 전통을 내세워 문제가 없다고 반박하였다.
 
그는 셋째 딸과 넷째 딸을 [[고려 인종|인종]]의 비로 들였는가 하면 숭덕부(崇德府)라는 부를 설치하였다.<ref name="dangtack136"/> 그러나 고려에서의 부는 왕자나 왕비에게만 설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관리가 부를 설치했을 경우 그의 지위는 왕자나 왕비와 다를 바 없었다.<ref name="dangtack136"/> 또한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매관매직하여 재산을 축적하였으며, 스스로를 국공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의 등급을 왕태자와 대등하게 보고 생일을 [[인수절]]이라 하여 전국에서 축하문을 올리도록 했다.<ref name="pare1996245"/> 그는 예종 때에 식읍을 하사받았는데, 그는 한때 조정의 허락 없이 사사로이 자신에게 부여된 식읍의 주부(注簿)인 소세청(蘇世淸)을 [[송나라]]에 보내어 표(表)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쳐서 논란을 야기하였으며, 스스로 지군국사(知軍國事)라 자칭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