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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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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국가 = {{국기나라|일본}}
}}
'''류큐국'''({{llang|ryu|琉球國|류추쿠쿠}})은 [[동중국해]]의 남동쪽, 현재 [[일본]] [[오키나와 현]] 일대에 위치하였던 독립 왕국이다. 100여 년간 삼국으로 분할되어 있던 것을 [[1429년]]에 중산국(中山國)이 통일하여 건국하였다. 류큐국은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시아]],고려와 중계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1609년]]에 [[사쓰마 번]]의 [[류큐 정벌|침공]]을 받은 이후, 여러 차례 일본의 침략을받아 [[1879년|1]]서[[1879년|79년]]에 일본에 강제로 병합([[류큐 처분]])되어 멸망하였고, [[오키나와 현]]으로 바뀌었다.<ref>김정숙, 《조선시대 필기,야담집 속 유구(琉球) 체험과 형상화》, 2011년, 한문학논집, 제32집, 37-57면 중 39면 참고</ref>
 
== 명칭 ==
정식 명칭은 '''류큐국'''(琉球國)이나, [[일본]]에서는 '''류큐 왕국'''({{ja-y|琉球王国|りゅうきゅうおうこく}}), [[조선]]에서는 '''유구국''' 또는 '''류구국'''이라고 불렀다.
 
== 역사 ==
{{참고|류큐 제도의 역사}}
 
== 정치 및 행정 ==
류큐국의 정치 행정조직을 수리왕부라고 하는데, 수리왕부의 가장 중요한 정책 결정기관이 평정소(評定所)이다. 평정소의 수장을 '섭정'이라고 하였으며, 실무를 담당하는 3인의 실력자를 '삼사관'이라고 하였다.<ref>정하미, 류큐왕국의 ‘兩屬‘문제’와 페리의 상륙, 2011년 2월, 일어일문학, 제49집, 417-432면 중 418면</ref>
 
== 종교 ==
=== 고유 종교 ===
류큐에는 고유의 종교가 있었다. [[슈리]]에는 [[키코에 대군]]어전({{ruby|聞得大君御殿|きこえおおきみうどぅん}}), 슈리전내({{ruby|首里殿内|しゅりどぅんち}}), 마카베전내({{ruby|真壁殿内|まかべどぅんち}}), 기보전내({{ruby|儀保殿内|ぎぼどぅんち}})가 있었다.
 
=== 기독교 ===
류큐국에 [[기독교]]([[로마 가톨릭]])가 전파된 것은 [[쇼호 왕]] 치세인 [[1622년]]으로, 야에야마에 서양 선박이 도항하고 전교하면서부터이다. 일본에선 [[기독교]]를 사회질서를 혼란하게 하는 종교로 간주하여<ref>기독교의 교리 중 '자살금지'가 있는데, 이는 일본의 사회질서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할복'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의 맹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의 2차 전국전쟁 당시 [[이시다 미츠나리]]와 손잡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맞섰지만 패배하여 결국 할복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는 기독교 신자란 이유로 할복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처형한 후 기독교를 박해하였다.</ref> [[1612년]]에 기독교 금령을 내렸고, [[사쓰마 번]]의 침공 이후([[1609년]]) [[일본]]의 조공국이었던 류쿠국도 기독교의 전교 활동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자와 섬]]이나 [[루손 섬]]에 왕래하던 서양 선박이 가끔 류큐 제도에 기항하여 전교 활동을 하기도 했다.(→[[기리시단]] 참조)
 
=== 불교 ===
{{류큐사}}
류큐국은 조선에서 준 불전(佛典)을 연못({{lang|ja|圓鑑池|엔칸치}})안에 섬을 만들어 거기 세운 건물({{lang|ja|辯財天堂|벤자이텐도오}})에 보관했다.
 
== 문화 ==
류큐국의 문화는 [[조선]], [[중국]], [[동남아시아]],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류큐국의 '테'는 일본에 전파되어 [[가라테]] 원형의 일부가 되었다.
 
=== 문학 ===
[[쇼세이 왕]]에서 [[쇼호 왕]]의 통치 기간([[1531년]]에서 [[1623년]])에 류큐 최고의 가요집(歌謡集) 《[[오모로소오시]]》(おもろさうし)가 편찬되었다.
 
== 대외 관계 ==
{{본문|류큐국의 대외 관계}}
=== 한국과 류큐국 ===
한국과 류큐국의 공식 교류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 [[1389년]]에 류큐국은 왜구에게 붙잡혔던 고려인을 보호하여 고려로 돌려보냈으며,<ref>고려사 신창(辛昌) 원년(1년) 8월 참조.</ref> [[조선왕조실록]]에 류큐국이 [[조선]]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왕조는 류큐국에 [[1416년]](태종 16년), 이예를 사신('유구국통신관')으로 파견하였다.<!-- 논란 여지 --> 이예는 왜구에게 잡혀 유구에 팔려간 조선인 44명을 쇄환하여 돌아왔다. 1430년대에는 류큐과 조선 사이의 뱃길에 왜구가 자주 출몰하고, 조선에 와서 류큐국 국사(國使)라고 사칭하는 일본상인이 있었다는 위사(僞使)문제가 생겨 그 뒤로는 중국을 통한 간접교류로 바뀌게 된다.<ref>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편 세종 5년 정월(1월) 4일 참조.</ref>
 
또, 류큐국(유구국)에서 사람들이 [[제주도]]나 [[경상도]]에 표류하였다는 기록이 여럿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인도적으로 처우하여 돌려보내졌다. 반대로 제주도 주민이 류큐국 영역까지 간 일도 있었다. [[1477년]](성종 8년)에 귤을 진상하려던 사람들의 배가 풍랑을 만나 류큐국의 [[요니구시]] 섬에 도착하게 됐다. 류큐 왕국은 표류민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어 이들은 [[1479년]]에 [[염포]](현재의 [[울산]] [[방어진]])로 도착할 수 있었다.
 
==== 임진왜란과 류큐국 ====
[[임진왜란]] 앞서, 일본은 조선에 [[명나라|명국]]을 칠 수 있도록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반면, 명국은 조선이 일본에 협력하여 명을 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조선은 이를 해명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는데 이 때 류큐국 사신이 일본 침략준비에 대해 같은 내용을 알려 오해가 풀리게 되었다. 명국은 이에 [[조선]], 류큐국, 섬라(暹羅: 지금의 [[타이]])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이 먼저 조선을 침략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9C%A0%EA%B5%AC&keyword=%EC%9C%A0%EA%B5%AC 조선왕조실록]</ref>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명과 그 길목에 있는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류큐에 협조할 것을 명령했으나, 류큐는 명국의 책봉국이었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였으며, 역으로 명에게 일본을 칠 것을 제안하였다.
 
==== 근세의 류큐 ====
류큐국이 일본으로 완전히 편입된 이후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독립한 뒤에 [[이승만]]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은 류큐국에 대해서 "그들도 자주독립의 의지를 확고히 하고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 각주 ==
<references />
 
== 읽을 거리 ==
{{위키공용|琉球國}}
* 유철인, 연구보고논문: 류큐 ( 유구 (流球) )의 가계계승과 조상, 2000년, 비교문화연구, 제6권, 제2호, 317-342면
* 이토 요시히데, 류큐(琉球)지역의 「아샤게(アシャゲ)」와 제사구조, 2001년, 한국민속학, 제34집, 181-199면
* 박훈, 유구처분기(琉球處分期) 유구(琉球)지배층의 자국인식과 국제관, 2005년, 역사학보, 제186권, 135-172면
* 차혜원, 명조(明朝)와 유구(琉球)간 책봉(冊封) 조공(朝貢)외교의 실체 -만력년간(萬曆年間)(1573-1620), 명조의 유구(琉球)정책을 중심으로-, 2008년, 중국사연구, 제54권, 129-160면
* 정진희, 양속기(兩屬期) 류큐(琉球)개벽신화의 재편과 그 의미, 2009년 5월, 아시아문화연구, 제16집, 244-270면
* 김정숙, 조선시대 필기 야담집 속 琉球체험과 형상화, 2011년 2월, 한문학논집, 제32집, 37-57면
 
{{류큐의 역대 국왕}}
 
[[분류:류큐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