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프 본 윌리엄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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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에 영국 왕립의무대원으로 참전했던 본 윌리엄스는 전쟁이 끝난 뒤인 1919년 모교인 왕립음악원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작곡가는 47살이었다. 1921년에는 바흐 합창단의 지휘자로 부임했고 아내의 신병 치료로 1928년 사임할 때까지 <마태 수난곡>과 <요한 수난곡>, <B단조 미사> 등을 연주하며 바흐의 종교음악을 의욕적으로 재조명했다.
 
당시 바흐 연주는 300명에 이르는 합창단원을 기용해 독일어 가사를 때때로 영어로 바꿔 부르고 하프시코드 대신 피아노를 사용했다. 작곡 당대의 옛 악기와 연주법을 적극적으로 되살리는 ‘시대연주’가 대세를 이루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전통적이고 낡은 연주법이지만, 본윌리엄스는본 윌리엄스는 타계하기 직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바흐의 종교곡을 지휘할 만큼 애착을 쏟았다. 영국이 20세기 후반 ‘시대연주’의 강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복고적이지만 헌신적으로 바흐에 매달렸던 본 윌리엄스의 공이 컸는지 모른다.
 
1940년부터 1946년까지 본 윌리엄스는 새 영어 찬송가집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이 때의 경험을 그는 '''“세계에서 최고의 작품들과 가까이 접촉한 2년 동안 많은 소나타와 푸가에서 받은 것보다 더 좋은 음악 교육을 받았다.”''' 고 쓰고 있다. 그는 스스로 6곡의 새곡을 작곡했으나, 그 말은 겸손하게도 쓰지 않고 있다. 성가집에서 편곡한 작품들, 찬양가 모음집, 그리고 옥스퍼드 캐롤집 등 그는 일생 동안 국민 음악에 대해 순수한 흥미를 명백히 보여준다. 그에 대한 다른 증거들은 레이트 힐(Leith Hill)음악제의 연례 행사에서 1909년부터 1953년까지 그가 지방 아마추어 가수들 및 연주가들에게 바흐와 다른 유명 작곡가들의 작품 공연을 지도하였다는 점 및 그동안에 베네딕트 등의 음악의 예로는 현악4중주 2곡, ‘악기들의 모든 결합’을 위해 쓴 ‘가계음악’(Household Music)과 3중 현악 합주를 위한 ‘합주 협주곡’등이 있다. 특별한 행사를 위해 쓴 작품들도 있는데, 1950년의 합창제를 위해 쓴 ‘사계절의 민요들’ 그리고 관현악과 16인의 솔로를 위한 ‘음악의 세레나데 (Serenade to Music)’등이 잇으며, 확성기와 소프라노 솔로 그리고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추수의 노래 (A song of Thanksgiving)' 및 기타 영화음악 등도 작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