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창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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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662년1649년에 숭헌복창군(福昌君)으로 책봉된 그는 1662년 대부숭헌대부(崇憲大夫)에 가자되고<ref>《조선왕조실록》 현종 5권, 3년(1662 임인 / 청 강희(康熙) 1년) 2월 14일(무오) 1번째기사</ref> 일찍이 진하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ref>《조선왕조실록》 현종 14권, 9년(1668 무신 / 청 강희(康熙) 7년) 5월 18일(을묘) 1번째기사</ref> 임금의 가까운 종친으로서 세력을 떨쳤다. [[내수사]]에 바치는 공물을 빼앗은 일로 파직되거나<ref>《조선왕조실록》 현종 11권, 6년(1665 을사 / 청 강희(康熙) 4년) 12월 30일(신사) 2번째기사</ref> 형제들과 사냥을 나가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등<ref>《조선왕조실록》 현종 14권, 9년(1668 무신 / 청 강희(康熙) 7년) 2월 22일(신묘) 1번째기사</ref> 종친으로서 위세를 부린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다.<ref>《조선왕조실록》 현종 19권, 12년(1671 신해 / 청 강희(康熙) 10년) 7월 17일(병인) 1번째기사</ref>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사은사 겸 동지사로 임명되어 청에 다녀왔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1권, 즉위년(1674 갑인 / 청 강희(康熙) 13년) 11월 7일(병인) 1번째기사</ref> 같은 해에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차자를 올려 복창군이 복선군과 함께 궁중의 나인과 간통하여 자식까지 갖게 되었다고 고발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3권,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3월 12일(경오) 3번째기사</ref> 그러나 복창군, 복선군 및 나인들이 모두 혐의를 인정하지 않자 숙종이 "남의 말을 믿고 골육의 지친(至親)이 헤아릴 수 없는 처지에 빠지게 하여 부끄럽다"며 놓아주게 하였는데<ref>《조선왕조실록》 숙종 3권,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3월 13일(신미) 2번째기사</ref> 명성왕후가 나서서 복창군 등의 일은 명백한 사실이며 숙종이 어려서 몰랐을 뿐이라고 하며 처벌을 주장하였다.<ref name="lhw">이한우,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21세기 북스, 2009, p.178, ISBN 9788950918941</ref> 이로 인해 복창군은 [[영암]]에 유배되었고,<ref>《조선왕조실록》 숙종 3권,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3월 15일(계유) 3번째기사</ref> 동생 복선군과 연루된 나인들도 각각 유배되었으나 남인들의 비호와 숙종의 애정으로 몇 달만에 풀려나 서용되었다.<ref name="lh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