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창군: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봇: 문단 이름 변경 (주석 → 각주) |
편집 요약 없음 |
||
23번째 줄:
==생애==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사은사 겸 동지사로 임명되어 청에 다녀왔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1권, 즉위년(1674 갑인 / 청 강희(康熙) 13년) 11월 7일(병인) 1번째기사</ref> 같은 해에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차자를 올려 복창군이 복선군과 함께 궁중의 나인과 간통하여 자식까지 갖게 되었다고 고발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 숙종 3권,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3월 12일(경오) 3번째기사</ref> 그러나 복창군, 복선군 및 나인들이 모두 혐의를 인정하지 않자 숙종이 "남의 말을 믿고 골육의 지친(至親)이 헤아릴 수 없는 처지에 빠지게 하여 부끄럽다"며 놓아주게 하였는데<ref>《조선왕조실록》 숙종 3권,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3월 13일(신미) 2번째기사</ref> 명성왕후가 나서서 복창군 등의 일은 명백한 사실이며 숙종이 어려서 몰랐을 뿐이라고 하며 처벌을 주장하였다.<ref name="lhw">이한우,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21세기 북스, 2009, p.178, ISBN 9788950918941</ref> 이로 인해 복창군은 [[영암]]에 유배되었고,<ref>《조선왕조실록》 숙종 3권,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3월 15일(계유) 3번째기사</ref> 동생 복선군과 연루된 나인들도 각각 유배되었으나 남인들의 비호와 숙종의 애정으로 몇 달만에 풀려나 서용되었다.<ref name="lh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