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두이노 디브레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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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7년]] 아르뒤노는 [[베르첼리]] [[주교]]를 살인한 죄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하였다.
 
[[1002년]] [[오토 3세]]가 죽자 그는 [[파비아]]에서 [[프랑크 족]]의 지배에 반대하는 [[롬바르드]] 귀족들에 의해 이탈리아의 왕으로 선출되어, [[1002년]] [[2월 15일]] 즉위하였다. 이때 밀라노의 주교 아르눌프는 그를 황제라 선언하였고<ref>''Liber gestorum recentium'' I.14</ref>, 롬바르디아의 귀족들은 아르뒤노를 카이사르(사실상 황제라는 뜻)로 불렀다. 그러나 [[라벤나]] [[주교]] [[프레데리크]]를 비롯한, 아르뒤노의 반대파들은 [[하인리히 2세 (신성 로마 제국)|하인리히 2세]]를 초청했다. [[하인리히 2세 (신성 로마 제국)|하인리히 2세]]는 즉위 초 반대파들이 즉위를 반대하여 취임하지 못했고, 당시 [[독일]]로부터 분리 독립을 시도하던 [[폴란드]]의 독립운동을 진압하느라 이탈리아 문제에 신경쓰지 못했다. [[1003년]] [[하인리히 2세 (신성 로마 제국)|하인리히 2세]]가 [[폴란드 국왕]] [[볼레수아프 1세]]를 패배시키자 곧 [[이탈리아]]에 간섭,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침공하였다.
 
아르뒤노는 [[하인리히 2세]]가 보낸 [[독일]] 군대를 패퇴시켰고, 하인리히 2세의 명을 받고 온 [[케른텐]]의 오토 1세는 소극적으로 전투를 지휘하였다. 하인리히 2세는 직접 출병했고, 아르뒤노는 아디제 계곡에서 하인리히의 군사를 가로막았지만 하인리히는 바르수가나를 거쳐 이탈리아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하인리히 2세의 출현에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혼비백산하여 군사를 이끌고 달아났고, 아르뒤노는 [[이브레아]]로 퇴각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