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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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관무역 외에 사신이 서로 내왕할 때마다 북경(北京)에서는 회동관, 서울에서는 태평관에서 두 나라 사이의 사무역(私貿易)이 행해졌다. 명나라에 조공을 하기 위하여 국내의 물산을 거둬들이며, 아울러 명나라의 우수한 물산이 국내에 들어오게 됨에 따라 국내 산업은 위축되고, 금은·인삼 등을 비롯한 각종 무역의 통제는 일반적으로 상업 활동을 침체케 하는 결점도 있었으나, 선진국인 명나라와의 교섭은 귀족의 생활 향상과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한 바도 많았다. 명나라와 조선 정부는 국초부터 오랜 숙제였던 종계변무문제(宗系辨誣問題)도 선조 때에는 해결됨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친선관계는 더욱더 두터워졌다.
 
그리하여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에서는 원병을 보내어 일본군을 격퇴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 전쟁을 통하여 명나라의 국력이 크게 소모된 사이에 만주 지방에서는 누루하치가 나라를 세워 국호를 후금이라 하고 명나라의 변경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에 [[광해군]]은 국내 여론에 못 이겨 군대를 파견했으나 사령관 [[강홍립]]에게 상황을 보면서 "명이 우세하면 청과 맞서고, 청이 우세하면 싸우는 척 하다가 항복하라"고 하여 조선의 국력 손실을 최소화했다. 광해군의 그러나 이는 명나라의 멸망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로 올랐으나 그 때는 조선도여전히 청나라와 화해하자는 파와파(주화파)와 청나라와 화해하면 안 되는 파로파(척화파)로 나뉘었다. 중국 상황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의 국력이 세지고 말아 조선은 그 때만 해도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요, 조선은 형제의 나라요.' 이런 입장이 있었다우새했다었다. 그래서 청에게 화해를과게국교를 맺지 하고않고고 불복하자 [[정묘호란]] 등이 청나라가 조선을 침범하게 된다(정묘호란). 하지만 1636년 조선이 굴복하지 않자 청이 다시 쳐들어와서(병자호란) [[남한산성]]에 있던 [[인조]]는 청나라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삼전도의 굴욕]]) 말아 청나라의 신하가 되고 말았다.
 
== 역대 황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