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경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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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915년]] [[9월 9일]] [[함경남도]] [[신흥군]] 신흥면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셋째 아들이라 하여 이름을 삼손이라 지었다. 뒤에 [[김일성]]이 서울을 지킨다는 뜻의 경수로 이름을 지어주어, 개명하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류경수는 소학교에 들어가지 못했고,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인 [[1931년]]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맹한 후 태평구 돌문안공청조직의 책임자 겸 소년선봉대 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ref><조선향토대백과> 평화문제연구소 2006</ref> 그는 사격술에 뛰어났는데, 특히 경기관총과 권총을 잘 사용하여 백발 명중시켰고, 이후 주로 경기관총 사수로 활동하게 된다. 돌문안공청조직책임자 겸 소년선봉대소대장으로 활동하며 [[1931년]] [[김일성]]의 지휘하에 1931년 추수투쟁과 1932년의 춘황투쟁에 참가하던 중 [[1932년]] 봄 체포되어 [[룡정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1932년 봄에는 일본군에 체포되여 룡정감옥에서 얼마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그의 본부인은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 (정치인)|김정숙]]의 여동생이었다. 그러나 일찍 죽었고, 류경수는 다시 [[황순희]]와 재혼하였다.
 
=== 경력 ===
[[1932년]] 반일인민유격대에 입대하여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6사에서 [[김일성]]과 함께 활동하였다.<ref><조선향토대백과> 평화문제연구소 2006</ref> [[1933년]] [[9월]] 소왕청 마촌에서 [[김일성]]을 만나 어린 혁명가라며 칭송을 받고, 그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다. 김일성의 측근이 된 그는 《그 품 떠나 못살아》라는 시를 직접 짓기도 했다.
 
{{인용문2|가까운 곳에서도 먼곳에서도<br />
그이의 맥박 내 몸에서 뛰고<br />
그이의 체취 내 몸을 덥혀주거니<br />
나는 언제나 그 품에서 사는 전사<br />
그 품 떠나 나는 못살아}}
 
[[1937년]] [[8월]] [[무송 현]] [[묘령 전투]]에서 일본군을 궤멸시켰다. 묘령전투에 일본군 70여명의 적을 사살하고 400여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40여명의 일본군 병사의 귀순을 받아들여 유격대에 받아들였다. 그리고 박격포 1문, 중기 1문, 경기관총 3정, 보총 200여정을 비롯하여 포대로 3,000여 마대의 밀가루 등 전리품을 획득했다. 그밖에 [[장백 현]] 간삼봉에서도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하였다. [[1939년]] 여름 [[연길현]] 천보산전투, 돈화현 요차전투에서 일본 관동군과 싸워 승전하였고, 그해 가을에 있은 안도현 한총구전투에서도 관동군 소부대를 궤멸시켰다.
 
[[1940년]]에는 만주 동만항일련군 2유격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전사한 김철운의 묘에 강위룡과 함께 남긴 편지가 [[2015년]] [[11월]]에 발견되기도 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61996 김철운항일투사 묘에 묻은 편지, 60년만에 발견]</ref>
 
=== 해방 이후 ===
해방 이후 귀국, [[1945년]] [[10월 21일]] [[조선인민군]]의 전신인 보안대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소련 군정]] 하에서 전차 정비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1946년 8월 15일 보안대가 인민집단군으로 개편하는데 참여, 이때 그는 인민보위부 중좌가 되고, 2사단 4대대장이 되었다. [[1947년]] [[5월 16일]] [[김일성]]의 지시로 북조선 지역 최초의 전차 부대인 제115여단을 창설, 여단장이 되었고 부대는 후일 [[1949년]] 5월 [[제105기갑사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제105땅크여단제105땅크려단]]으로 개편되었다.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군에 참여하였다.
 
[[1948년]] [[6월]]부터 [[8월]]에는 인민집단군 115려단에서 땅크부대 창설 명령을 받고 땅크련대 창설에 착수했다. 3개월간 병사들에게 땅크 운전기술을 가르쳐 그해 [[11월]] 정식으로 조선인민군 땅크련대를 조직했다. [[9월 2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피선되었다. [[1949년]] 중좌에서 대좌가 되었다가, 얼마 뒤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1949년]] 중좌에서 대좌가 되었다가, 얼마 뒤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 한국전쟁 ===
[[1950년]] [[6월 25일]] 새벽, 인민군 제105전차려단은 류경수 려단장의 지휘 아래에 [[조선인민군]] 제1군단 휘하 제1, 3, 4, 6사단에 제203, 109, 107전차연대와 제206연대가 배속되어 진격하였다. 그는 100호 전차를 타고 [[동두천]]과 [[의정부]]를 통해 내려왔다. 이때 동두천에 주둔중이던 [[대한민국 국군]] 소규모 부대를 격파한 뒤 그대로 직진, [[의정부]]에 주둔중이던 [[대한민국 국군]] 7사단에 저지당했으나, 인민군 3사단 18연대의 지원으로 의정부를 함락시키고 3일만에 서울에 입성하였다.
 
제105땅크여단 35땅크연대 1대대 3중대 소속 제312호 전차가 가장 먼저 [[서울특별시]]에 진입, 312호 전차 포장 고현빈이 당시 [[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중앙청]]건물에 [[인공기]]를 계양하였다. 류경수는 예하 연대를 통솔하여 [[서울특별시]]를 점령하였다. [[6월 28일]]에는 [[서울대학교]] 대학 병원에병원과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있던 대한민국 국방군 부상병들과 우익 인사들을 골라 사살하였다.
 
이에 따라 부대는 [[1950년]] [[7월 5일]] 당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수상에 의해 '서울' 명예칭호를 수여받았으며 사단으로 증편되었다. [[7월 18일]] [[평택]]에서는 미 공군의 F-80기의 집중 공격으로 전차 38량과 자주포 9량, 차량 118량이 파손되었다. 그러나 평택을 지나 [[대전]]을 공략하여 대전시내를 함락시켰다. 이후 [[대전]]에서의 전투 성과를 기려 [[1950년]] [[7월 2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제54호에 의하여 군사 명예부대 칭호인 '근위대' 칭호를 수여받고 "근위 서울제105땅크사단"으로 승격된다. [[1950년]] [[8월]] [[공화국 영웅]] 칭호가 수여되였다.
 
[[8월 13일]]에는 교체되어 조선인민군 제3사단 사단장이 되어 [[대구]]로 갔다. [[1950년]] [[9월]]에는 [[미국 군]]에 포위되어 식량과 비상미가 떨어진 상태에서 14일간 버텼으며, 당시 인민군 최고사령부와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2001년 5월 23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0089호에 따라 한국전쟁 당시 지휘관이었던 류경수의 공적을 기려 "근위 서울류경수제105땅크사단"으로 최종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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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관계 ==
* 부인 : 이름 미상, 일찍 사망
* 부인 : [[황순희]](黃順姬, [[1919년]] [[5월 3일]] - ), [[조선혁명박물관]] 관장 역임
** 딸 : 류춘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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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각주}}
 
== 외부 고리 ==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61996 김철운항일투사 묘에 묻은 편지, 60년만에 발견]
*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4299 북, 류경수탱크사단장이 김철운항일투사 묘에 묻은 편지 60년만에 발견]
 
{{토막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