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프 본 윌리엄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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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부터 구상에 들어갔던 [[바다교향곡|교향곡 1번 ‘바다’]]가 라벨과의 만남을 거쳐 6년여 만인 1909년에 완성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라벨은 제자의 작품을 프랑스 음악계에 소개하기 위해 애썼고, 본 윌리엄스는 스승을 영국에 초청하면서 음악적이고 인간적인 교유를 이어갔다. 라벨은 “나는 파리지앵이지만 런던을 그리워하는 파리지앵”이라는 편지를 제자 본 윌리엄스에게 보냈다.
 
[[파일:Ralph Vaughan Williams Plaque - geograph.org.uk - 1050250.jpg|thumb|]]
본 윌리엄스의 스승이 라벨이었다면, 음악적 동반자는 <[[행성 (모음곡)|행성조곡]]>의 작곡가 [[구스타프 홀스트]]였다. 본 윌리엄스는 2년 연하인 홀스트와 1896년 왕립음악원에서 만난 직후부터 곧바로 절친한 친구가 됐다. 본 윌리엄스가 “내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했던 홀스트는 17세기 이후 오랫동안 묻혀 있던 퍼셀의 오페라 <디도와 아이네이아스>와 <요정 여왕>등을 잇달아 지휘, 연주하면서 영국 음악의 전통을 재조명했다. 이런 의기투합을 통해 본 윌리엄스와 홀스트는 20세기 초반 영국 음악계를 주도하는 주역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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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윌리엄스는 9편의 교향곡과 다른 관현악 작품들, 가곡들, 오페라와 많은 합창곡들을 발표했다. 다양한 규모와 형식을 가지고 있는 본 윌리엄스의 음악은 민족적이고 세계적인 2가지 원천으로부터 꾸준히 유도되었다. 하나는 홀스트와의 우정을 지속하면서 채짐한 영국 민요와 성가이고, 다른 하나는 [[바흐]], [[헨델]], [[드뷔시]]와 라벨의 서구적 전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의 음악의 근본적인 본질은 어느 유력한 한 작곡가의 영향으로부터 암시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심원한 깊이를 가진다. 그의 작품은 “작곡가는 스스로를 결코 닫지 말고 예술을 생각하며, 동시대의 사람들과 같이 살고 호흡하여 자신의 작품을 사회의 모든 삶의 표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 대한 본보기이다.
 
[[파일:Ralph Vaughan Williams Plaque - geograph.org.uk - 1050250.jpg|thumb|]]
제1차 세계대전에 영국 왕립의무대원으로 참전했던 본 윌리엄스는 전쟁이 끝난 뒤인 1919년 모교인 왕립음악원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작곡가는 47살이었다. 1921년에는 바흐 합창단의 지휘자로 부임했고 아내의 신병 치료로 1928년 사임할 때까지 <마태 수난곡>과 <요한 수난곡>, <B단조 미사> 등을 연주하며 바흐의 종교음악을 의욕적으로 재조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