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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6월 10일]]부터 [[조선공산당]] 당원들은 일본 당국의 단속을 피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자 최용건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는 황포군관학교 졸업생들 일부를 회유하여 만주로 갈 때 데려갔다. 만주 체류 당시 그는 최석천(崔石泉)과 김지강이라는 가명을 썼으며 중국 자료에는 주로 최석천으로 나온다.
[[중국공산당]]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 북만주 지역으로 이동, 북만주 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그는 1930년대 발족한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하였다. 이후 화요파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군사부장을 맡으면서 동시에 [[중국공산당]]에도 입당하여, 이중당적을 가지고 활동하면서 [[중국공산당]] 빈현지구당 당 서기도 겸직했다. [[1932년]]에는 조선족 학생들을 위한 학교인 [[송동모범소학교]](松动模范小学校)를 개교하고 교장으로도 활동했다. 이때 그의 제자들 중 이민은 그와 함께 교도여단에서 활동했고, 배경천은 후일 그와 항일연군에서 활동하는 [[배성춘]](裴成春, 본명은 배경창(裴敬昌), 가명은 손명숙))의 남동생이었다. [[1936년]] [[동북항일연합군]] 제7군단장으로제2로군 제7군단 정치위원이 되었다가, 군단장 이학만이 제4군장으로 가자 [[1936년]] [[11월]] [[동북항일연합군]] 제2로군 제7군단장이 되어 항일무장투쟁에 참전하였다. 이후그러나 동북항일연군병력 군단장지휘, 통솔능력의 부족이 지적되어 곧 군단장에서 해임되고 제2로군 참모장으로 전임되었으며 [[중국공산당]] 정치위원회 서기직을 겸직했다. 이후 제2로군 참모장, 제7군장, 정치위원등 을 지냈고,지냈다. 1938년에 다시 제2로군 제7군장이 되었다가 [[1939년]]에 [[소련]]으로 북상하였다. 소련 극동지방으로 이동하여 1940년대 들어 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88 국제 여단 (소비에트 연방)|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참가했다. 당시 직급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 제2련 정치참모로, [[김책]], [[김일성]]보다 한 단계 높았다.
 
[[1940년]] [[3월 26일]] 최용건은 자신과 경쟁관계에 있던 [[경락정]]에게 일본과 내통하고 변절을 선동하였다는 누명을 덮어씌워 총살형에 처한 뒤 "원체 사태가 엄중하고 상황이 긴박한데다가, 경락정이 당장이라도 일본군쪽으로 도주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죽이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이미 총살해버렸다."는 내용의 서한을 [[주보중]]에게 보냈다. 그러나 경락정이 이전에 일본군 혹은 일본인을 만났다는 증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