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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이 200명 정도 참가했던 이 폭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많은 혁명가가 희생되었다.<ref name="항일빨치산1"/> 그러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최용건 등은 살아남은 [[한국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상하이]] 항구 부둣가 근처의 은신처에 숨어있다가 [[만주]]로 파견되었다. 후일 최용건과 생존자들은 한 차례 합의를 거쳐 광저우의 그 진지에 봉기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광저우열사능원리에 기념관을 건립했다.<ref name="프레"/><ref name="한겨레"/> [[1927년]] [[11월]]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연합집행위원회 [[광저우|광주]]지구 대표위원에 선임되었고 [[1928년]] [[민족 유일당]] 운동에 관여하여, 최추해라는 이름으로 민족유일당 운동 지도자의 한 사람에 이름을 올렸다.
 
==== 항일무장투쟁 ====
===== 교육자 활동 및 학교 설립 활동 =====
[[조선공산당]] [[화요파]]로 파견된 최용건은 [[길림성]]과 [[흑룡강성]] 등을 다니며 모범[[소학교]]를 비롯, 각종 [[소학교]], [[농민학교]] 등을 여러 개 세우면서 교육사업과 농촌 계몽 활동을 하며 [[중국 공산당]] 입당을 위해서 노력하고, 이곳을 혁명 근거지로 삼아 조직적으로 항일세력을 키운다.<ref name="항일빨치산1"/> 그는 [[모범소학교]]와 [[흑룡강고등중학교]], [[농민학교]]와 여러 학교들을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고 동시에 그 학교 교사로 활동했으나, [[모범소학교]], [[흑룡강고등중학교]], [[농민학교]]와 각급 학교들이 정착되면 [[소련]], [[독일]],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교육학을 전공한 인물, 저명한 인물을 초빙하여 교장직과 학교를 모두 인수인계해주었다. 그러나 학교를 인수인계하는 조건에 [[기독교]] [[선교사]]는 무조건 거절, 배제하였다. 그는 [[1927년]] 가을 국내인 [[함경남도]] [[단천군]] [[광천면]]에도 지역 유지들 중 뜻있는 인물들이 학교 부지를 기부하여 [[단천고등중학교]]를 설립, [[1928년]] [[3월]]했으나, [[단천고등중학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사상이 불온한 학생들을 길러낸다는 이유로 설립인가를 거부, [[1931년]]에 폐교하였다.
 
상하이 체류 중 그는 최추해라는 이름을 썼다. 당시 항일투사들은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여러개 썼는데, 각종 기록에 최석천이란 이름으로 나오는 사람이 바로 최용건이다.<ref name="항일빨치산1"/> 최석천이라는 가명 외에 그는 김지강이라는 가명도 썼다.<ref name="항일빨치산1"/> 그밖에 룡건, 용건(鏞鍵), 최용진 등 다양한 가명을 사용하였다.
 
===== 항일무장투쟁만주 항일 무장 투쟁 ====
[[1930년]] [[6월 10일]]부터 [[조선공산당]] 당원들은 일본 당국의 단속을 피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자 최용건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는 황포군관학교 졸업생들 일부를 회유하여 만주로 갈 때 데려갔다. 만주 체류 당시 그는 최석천(崔石泉)과 김지강이라는 가명을 썼으며 중국 자료에는 주로 최석천으로 나온다.
[[1935년]] [[8월]] 다시 요하 일대 중국인 항일부대들 지휘관들과 만나 함께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을 편성하고, 요하 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2사 제4단 참모장이 되었다. [[1936년]]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2사 정치위원이 되었다.
 
===== 소련 동북항일련군 활동 =====
[[1936년]] [[동북항일연합군]] 제2로군 제7군단 정치위원이 되었다가, 군단장 이학만이 제4군장으로 가자 [[1936년]] [[11월]] [[동북항일연합군]] 제2로군 제7군단 대리[[군단]]장이 되어 항일무장투쟁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병력 지휘, 통솔능력의 부족이 지적되어 곧 대리군단장에서 해임되고 제2로군 참모장으로 전임되었으며, [[중국공산당]] 정치위원회 서기직을 겸직했다. 이후 제2로군 참모장, 제7군장, 정치위원등 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