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조구치 겐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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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는 [[도쿄 시]] [[아사쿠사 구]] (현·[[도쿄 도]] [[다이토 구]] [[아사쿠사]]) 출신으로, 아버지는 목수였다. 그의 가정환경은 비참한 수준이어서 그의 누이를 게이샤로 팔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이 일은 겐지의 사고방식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아버지의 학대 사이에서 그는 강하게 저항하곤 했으며, 그는 평생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고베(神戸)의 광고 디자인 일을 시작했으며 동시에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유우신일보(又新日報)사의 삽화가로 일하기도 했다. 1920년에 그는 [[닛카츠]](日活) 촬영소에 입사하는 것으로 영화계에 투신했는데 처음에는 배우로 시작했다. 3년뒤 니카츠에서 감독이 되었고 [[관동대지진]]이후 동경촬영소로 옮긴다. 1925년 내연의 여인에게 면도칼로 찔리는 사건이 있은 후 여성을 테마로 한 작품을 독특한 감각으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1939년 나카다 마사이치(永田雅一)의 다이이치 영화사(第一映画社)에 참가하고 이후 다이에이(大映) 영화사 창립 이후 전속이 된다.
 
겐지의 초기 작품들은 탐색에 가까운 것으로 [[유진 오닐]]이나 [[레프 톨스토이|톨스토이]]등의 작품들로 문예영화를 만들거나 독일 표현주의 영화들을 따라해보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그의 작업속도는 매우 빨라서 몇주만에 영화 한편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흥행성적도 좋았다. 그래서 20년대와 30년대 사이에 70여편의 영화를 찍는 것이 가능했는데 현재 이것들은 거의 유실되었다. 뒤쪽의 것들은 소위 경향영화(tendency film)라고 불리는 것들로 겐지는 그 작품들에서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드러내었고 선구적인 존재가 되었다. 1936년의 [[기온의 자매들]]과 [[나니와 엘레지]] 이후가 되어서야 겐지는 자신의 인생을 대표할 만한 영화들을 찍기 시작했다.
 
그의 중기에 겐지는 전근대와 근대의 전환기를 담는 사회파 영화인 '뉴 리얼리즘' 감독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마지막 국화 이야기]]는 문부성으로부터 상을 받았는데 앞선 두 영화처럼 남성중심사회에 반한 여성의 역할에 대해 모색하고 있다. 이 시기에 겐지는 그의 유명한 방법론인 '원신, 원샷' 원칙을 확립하였다. 그의 섬세하고 정통적인 세트 디자이너인 미즈타니 히로시는 겐지가 광각렌즈를 자주 이용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전쟁기간동안 겐지는 선전영화를 찍도록 군부로부터 강요받았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은 충신장 이야기를 담은 사무라이 시대극 [[원록충신장]](1941)이다. 이 시기에 겐지는 문제가 될 만한 소재를 피해서 작품생활을 했다. 일본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던 무렵의 혁명적인 영화 [[여인의 승리]](1946)나 [[내 사랑은 불탔었지]](1949) 이후 겐지는 시대극으로 전환하여 전래되던 이야기들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많이 했는데 주로 비극적 취향이 강했다. 이 때는 시나리오 작가인 [[요다 요시타카]]와 주로 함께했다. 이 때가 가장 인정받는 시기로 베니스에서 은사자상을 받은 [[우게츠 이야기]](1953)을 비롯해 그를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오하루의 일생]](1951)이 그러하다. [[산쇼 태부]](1954)는 봉건사대 일본의 유교적 도덕에 관한 이야기이다. 백편에 가까운 그의 영화 중에 칼라영화는 [[신페이가 이야기]](1955)와 [[양귀비 (영화)|양귀비]](1955)뿐이다.
 
겐지는 교토에서 58세로 죽었는데 사인은 백혈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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