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드 브르퇴유 뒤 샤틀레 후작부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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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틀레 후작부인 가블리엘레 에밀리 르 토넬리에 드 브르퇴유'''({{llang|fr|Gabrielle Émilie Le Tonnelier de Breteuil, marquise du Châtelet}})는 '''에밀리 뒤 샤틀레'''({{llang|en|Emilie du Chatelet}}, [[1706년 12월 17일]]~[[1749년 9월 10일]])로 알려진 프랑스의 과학자이다. 최초의 근대과학의 여성과학자로 불린다. 여성의 중등교육을 허락하지 않았던 시대였지만 에밀리의 가문은 높은 계급에 속했고 상당한 자산을 소유했기 때문에 과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자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 속에서 학문을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라틴어로 쓰여진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명료한 이해를 돕는 상세한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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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레이 성 ===
에밀리의 남편은 시레이에 오래된 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에밀리와 볼테르는 이 곳을 두 사람의 연구실 및 주거공간으로 개조했다. 2년여의 공사를 거친 끝에 탄생한 시레이 성은 파리의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견줄 만한 도서관과 런던에서 수입해온 최신 실험 장비를 갖추게 되었다. 방문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객실용 방들과 세미나실도 있었다. 공동 서재를 두었고 서로 독립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개인 서재에는 학문 연구를 위해 항상 커튼을 내려 동트기 전후의 조명 상태를 유지하였다. 점차 시레이 성에는 유럽의 최고 과학자들이 방문하기 시작했다. 에밀리와 볼테르는 10년 이상 시레이의 성에서 함께 살았다. 오래된 성을 개조해서 공동 서재와 개인 작업실, 여러 개의 객실을 두었다. 볼테르는 종종 에밀리의 작업실에 방문해서 뉴턴의 라틴 원문을 네덜란드어
외국의 많은 신진 학자들이 이곳에 머물다 갔다. [[쾨니그]]나 [[베르누이]] 같은 과학자들은 이곳에서 장기간 묵기도 하였다. 에밀리 뒤 샤틀레와 볼테르는 유럽 과학자들과의 협력으로 뉴턴 연구의 기초가 확립되는 것에 만족했다.
운동하는 물체가 갖는 힘에 관한 연구로 시레이는 몇 안되는 진정한 독립 연구소로 인정받게 된다. 연구소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시레이 성에서 그들이 독자적으로 개척한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둘은 파리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에 세간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에밀리는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했으며 뉴턴 학문에 대해 공부하였다. 이 시기에 그녀는 여러 저작을 남겼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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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saac Newton - Principes mathématiques de la philosophie naturelle, tome1.djvu|thumb|뉴턴의 프린키피아 프랑스어 번역본 2판 1권]]
=== 뉴턴의 [[프린키피아]] 번역 및
당대의 현대 수학이었던 [[미적분]]을 토대로, 복잡한 [[기하학]]을 보다 쉽고 명료하게 재해석을 한
이 책은 에밀리가 죽고 난 후에 출간되었으며 오늘날에도 프랑스에서 쓰이는 《프린키피아》의 표준적인, 그리고 유일한 번역서이다. 에밀리가 이 책을 훌륭히 번역하였기 때문에 프랑스는 영국보다 100년 앞서 과학이 발달할 수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왜냐하면 영국에서는 복잡한 기하학으로 가득찬 판본을 읽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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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9.《행복론({{llang|fr|Discours sur le bonheur}})》에피쿠로스주의적 성격이 있는 이 책은 그녀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은 행복의 방법론을 논한 최초의 책으로 6번 재발행 되는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의 내용은 사랑의 형이상학에 관한 것이었다. 1746년에 쓰여졌고 1779년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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