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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이전의 문헌(선진문헌{先秦文獻})에는 기자가 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은둔하였던 사실만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이후 기자의 삶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기자조선이 나타나는 최초의 문헌은 《상서대전(尙書大全)》과 《[[사기 (역사서)|사기]]》이다. 《상서대전》은 중국 최초의 역사서로 평가되는 《상서》에
이러한 기자동래설에 대한 기본 문헌들이 등장한 이후부터 기자동래설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기자를 조선의 군주로 숭상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가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신라]]의 [[최치원]]도 기자동래설을 긍정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유교]]가 통치 이념으로 점차 굳어져 가면서 한국 유교문화의 시원적 존재로 기자에 대한 숭배가 강화되었다. 그 결과 [[1102년]]에는 평양에 기자사당이 세워져 국가의 제사를 받았으며 기자의 묘까지 만들어졌다. 이후 [[조선]] 초기에는 단군과 기자가 나란히 국조로 숭상되었으며 《동국사략》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삼조선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정립하면서 기자조선이라는 왕조가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사림]]에 의해 기자 존숭 의식은 더욱 발전하였고, [[이이]]의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같은 기자에 대한 전기적 서적이 편찬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종휘]]의 《기자세가》, 정인기의 《기자지》 등에서 역대 왕의 명칭과 재위 연도 등 구체적인 내용이 등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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