훙커우 공원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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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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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커우 공원 입장 ===
홍커우 공원에는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는 [[히로히토|일본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행사와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하고 있었다. 7시 50분 윤봉길은 삼엄한 감시를 피해 [[홍커우 공원]]으로 도착했고, 최대한 무대 위로 접근하자는 마음에 중국인 [[경비원]]이 지키는 문으로 향하였으며,유창한 [[일본어]]로써 자신을 [[일본인]]으로 속이고 들어갔다. 9시 쯤에 시작된 관병식은 11시즈음에 끝났으며, 11시 20분 즈음에 2부로 상하이 전승 기념식을 거행했다. 중국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등장해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난 뒤에는 [[외교관]]과 내빈이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았다. [[일본]]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하기 시작했다.
=== 의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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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 40분에 [[일본]] [[국가 (노래)|국가]]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고, 거의 끝날 순간에 윤봉길이 단상으로 접근해 5m거리에서 물통폭탄을 투척. 시라카와 대장과 노무라 중장 사이에 떨어져 폭발하였다.<ref>신용하. 1995. 윤봉길의 농민운동과 민족독립운동. 한국학보:Vol.21. No.4(P.125, P. 126). 일지사.</ref>
최초 광경 사진을 찍은 황천 기자는 이후 상황은 찍지못하고 나중에 어떤 사진가로부터 사진을 받았다고 한다.
{{인용문2|사건이 터졌을때, 다른 신문사들은 아직 행사장에 오지 않았다. 나는 최초의 사진 1장을 찍은 뒤 공원부근 지국장의 사택으로 가서 전화로 지국에 제1보를 보냈다. 그래서 그 후의 상황은 찍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어떤 사진가로부터 받은 사진을 냈다.|황천 기자}}
=== 죽음 ===
체포된 윤봉길은 같은 해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아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 시|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金澤陸軍刑務所)에서 7시 27분 사형 집행. 정사수가 쏜 총알이 미간에 명중하면서 13분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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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윤봉길]]
[[분류:1932년 4월]]
[[분류:1932년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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